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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 64 - 원경왕후의 죽음 이후
 
세종신문   기사입력  2020/02/06 [09:11]
세종 2년 7월은 대비인 원경왕후의 죽음에 관한 일이 주를 이룬다.
백성들의 입장에서야 천재지변도 아니고 전쟁도 아닌 왕가의 상일뿐이지만 왕궁의 입장에서는 큰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독 기사의 내용이 많고 임금과 신하들의 설왕설래가 많은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세종의 태도이다. 실록은 이런 세종의 상황과 마음씀을 계속 기록으로 남긴다.

7월 10일 대비가 돌아가자 상왕과 대신들은 당장 궁궐 예법에 맞는 출상준비를 한다.

“이번 대비의 병환에 부처에게 빌어 살기를 구함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으되, 마침내 효험이 없었고, 또 성미가 불도를 좋아하지 않는 고로, 내가 이를 시설하지 말고자 하나, 그러나 감히 갑자기 폐지하지 못하여, 다만 칠재(七齋)만 시행하고 법석의 회(會)는 베풀지 말라.
치상은 힘써 진실한 것을 좇고, 사치하지 말라. 그리고 모든 국가 사무는 주상이 변복하기 전에는, 병조가 선지(宣旨)를 받아 각조(各曹)에 내려 시행케 하라”(2년 7월 10일)

부처에게 빌었으나 효험이 없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태종은 불교가 국가통치에 해가 된다는 입장이 분명했다. 다급할 때 종교를 찾고 가장 대중적인 민속종교로 자리잡은 불교지만 어떻게든 그 세력을 더 크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후에 신하들은 이른 시간에 왕궁의 장례에 대한 후유증을 벗어나기를 권하는 다양한 말을 하고 임금은 예법에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위한 변론이 좀 있었다. 신하들도 걱정이 많다.

의정부와 육조가 합사(合辭)하여 계하기를,
“전하께서 대비를 모시고 시탕(侍湯) 하옵시기 근 50일에 수고와 근심하옵심이 대단하시던 차에 대고를 당하시와, 애통하옵심이 너무 심하옵시며, 식음을 폐하시고 머리 풀고 거적자리에 앉고 눕고 하옵시니, 어찌하여 상왕의 아끼시고 염려하옵심을 생각지 않으시고 이처럼 고집을 하시나이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 등의 청하옴을 억지로라도 좇으시어 슬픈 정회를 억제하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일러 말하기를,
“내 어찌 생각지 아니하리오. 어제 부왕께서 원숙을 보내어 나에게 죽을 권하시므로, 내가 두어 숟갈을 마셨으니, 경 등은 근심하지 말라.”
하였다. 때가 심히 덥고, 기후가 음습한데, 임금이 평상(平床)을 치우고 거적자리 위에 엎드려 밤낮으로 통곡하니, 궁인들이 가만히 유둔(油芚)을 거적자리 밑에 넣었더니, 임금이 알고 명하여 걷어 내게 하였다.(7월 11일)

그리고 곧바로 능을 만들고 그 옆에 절을 지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넘어갔다. 상왕 태종이 먼저 운을 뗀다.

“능침(陵寢) 곁에 중의 집[僧舍]을 세우는 것은 고려 태조로부터 시작되어, 아조에서도 역시 개경사(開慶寺)·연경사(衍慶寺)가 있으니, 이제 대비 능침에도 중의 집을 지을는지 그 가부를 의정부와 예조에 문의하여, 만일 창건함이 마땅하였다고 하거든 마땅히 지어야 한다는 이유를 묻고, 만일에 불가하였다 하거든 그 불가한 이유를 물어라. 만일 다들 창건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건축하는 비용은 내가 본래 저축함이 있으니, 나라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리라. 이제 나의 이 말은 무슨 다른 까닭이 있어서 함이 아니니, 각가 소회(所懷)를 진술하되, 혹시라도 제 뜻을 굽혀서 좇지는 말라. 그들이 만일 상왕의 뜻은 어떠하던가 묻거든, 상왕은 절을 짓지 않고 법석(法席)의 회(會)도 역시 개설(開設)하지 아니하여, 이로부터 법을 세우려 한다고 대답하라.”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거짓은 내가 알지 못함이 아니나, 다만 능소 모신 후에 빈 골짜기가 쓸쓸한즉, 곁에 정사(精舍)를 짓고 깨끗한 중을 불러 모아 두면, 내 생각에 명명한 가운데에서도 위로하는 도리가 있지 않을까 함이니, 이것은 내가 차마 못 견디는 바이다. 경은 그리 알고 다시 아뢰어라.”

민간에서는 불교를 장려하지 않으면서 국가차원에서는 명복을 위해 절을 짓는다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염려를 먼저 말하자 세종은 입장이 조금 다르다. 다분히 인지상정, 능이 쓸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차마 견딜 수가 없다’면서 깨끗하게 절을 짓고자 한다. 세종은 불교의 가르침과 종교적 교의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리 큰 거부감을 갖고 있지는 않다. 다만 정치적 차원에서 삼갔을 뿐이다. 말년의 내불당 사건만 해도 내면에 잠재된 입장이 나온 것일 것이다. 상왕이 대답한다.

“내가 주상의 ‘빈 골짜기가 쓸쓸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그 말이 깊이 옳다고 하나, 그러나 산릉은 내가 백세 후에 갈 땅이라, 이제 비록 깨끗한 중을 불러 모으나, 뒤에 늘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더러운 중의 무리가 내 곁에 가깝게 있게 된다면, 내 마음에 편하겠느냐. 역시 내 마음에는 맞지 않는다. 이제 산릉은 내 마땅히 법을 세워서 후사(後嗣)에게 보일 것이니, 만세 후에 자손이 좇고 안좇는 것은 저희에게 있다. 절을 두지 말라.”

결국 절을 짓는 것은 없기로 했다. 그리고 임금은 계속 상주로서 할 바를 과하게 한다. 실록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날 저녁에 큰 비가 와서 물이 넘쳐 여차(廬次;상중에 상주가 기거하는 띠집)에 들어오되, 임금이 오히려 옮기지 않으니, 모든 대언이 합사하여 청하기를,
“바람과 비가 함께 휘몰아치는데, 여차는 작고 좁사오니, 어찌 지존(至尊)하옵신 몸으로 누습함을 피하시지 않고 온 밤을 지내려 하십니까. 하늘에 계신 대비의 영혼이 어찌 슬퍼하시지 않으시리이까. 상왕께서 들으시면 또한 반드시 놀라 염려하실 것이오니, 그러면 효복(孝服)에 대하여 청하신 것도 또한 이루지 못하실까 하오니, 바라옵건대 위로 자애하옵시는 정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신민의 바람에 좇아 광연루 아래로 옮겨 자리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후께서 병환이 드시매, 주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그 나으시기를 바랐으나, 마침내 효험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니, 이 몸의 죽고 사는 것은 감히 돌아볼 바가 아니다.”
하고, 눈물 흘려 울며 듣지 않으매, 대언 등도 울며 굳이 청하여, 광연루 아래로 자리를 옮기어, 다만 쑥대로 자리를 까니, 대언 등이 부르짖어 울며 굳이 청하니, 임금이 이에 해진 병풍과 홑 돗자리를 깔았을 뿐이었다. 날이 밝으매 다시 여차로 돌아갔다.

이 몸의 죽고 사는 것은 감히 돌아볼 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일개 필부의 용기이지만 임금이라는 막중한 임무 앞에서는 함부로 할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심정만큼은 얼마나 절절한 지 읽히는 대목이다. 세종의 진심 어린 정치가 그 효심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겠다.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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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2/06 [09:11]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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