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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와 선비의 길
세종 철학의 힘-생생[거듭살이]의 삶을 찾아서 ⑭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10/30 [22:54]
▲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의 인간관을 사풍(士風)에 근거해 풀어보고 있다. 사람은 배워야 하고 선비는 의로움을 지녀야 한다. 세종은 선비가 자기 나름의 정신적 자산인 인간으로서의 철학과 실용적 자산인 기술을 지니는 통유(通儒)가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인물들을 역사적으로 중국에서는 군자로, 우리는 선비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선비[士]는 지식인에서 출발한다. 군자와 선비에 대하여 알아보자.

중국의 군자(君子)
 
중국의 오래된 기록에 나오는 사(士)로서의 군자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 군자 [chun-tzu, 君子] (Junzi). (西周)·춘추시대 귀족에 대한 통칭으로〈국어國語〉노어상(魯語上)편에 조귀(曹劌)의 말이 있다. “군자는 다스리기에 힘쓰고 소인은 노동에 힘쓴다.”

'군자'는 당시의 통치계급을 가리키고 '소인'은 육체노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혼란해진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주나라 예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단순한 복고(復古)가 아니고 배운 사람들이 주도하는 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이들을 ‘군자’라고 부르고 군자는 중국문화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길이다. 

논어에 이런 글이 있다. “공자가 자하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군자적인 학자가 되어라. 소인적인 선비는 되지 마라. 女爲君子儒位. 無爲小人儒.”(《논어》옹야편)

지식인과 대립되는 신흥 상인들은 ‘소인’(小人)이라 불렀다. 
춘추 말년 이후 군자는 점차 도덕수양을 갖춘 사람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음으로 먼저는 학자 즉 공부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을 것이다. 공부를 했으면 다음에 자연스레 남을 위해 봉사하는 관리가 되거나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좀 배웠다고 모두가 나라를 다스리는 관리가  될 수 있을까.

“등용되면 도를 행하고 등용되지 못하면 도를 간직해 두어야 한다. 用之則行 舍之則藏”(《논어》술이편)
아무리 공부를 했더라도 당시는 나라에서 그 사람됨의 평판을 듣고 채용해주어야 관리가 되는 것이지, 이렇게 저렇게 손을 놓아서 관리가 되는 일은 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공부보다도 사람 됨됨이가 더 중요한 것이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자왈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논어》자로 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고 획일적이지 않으며, 소인은 획일적이고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또한 군자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선한 행동에 힘쓰면서 게으르지 않은 사람을 군자라고 한다.”(《예기禮記》곡례편) 라고 되어 있다.

군자의 주요한 덕목은 관리가 되거나 이득을 취하는데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무항산이유항심자 유사위능. 떳떳한 생업이 없으면서도 떳떳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직 선비만이 가능한 것이오.” (《맹자》 양혜왕 상 7)
그리고 군자가 되어서는 의(義)를 실천 할 수 있어야 한다.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논어》14 헌문편) “선비가 위태로움을 당해서는 생명을 바치고,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한다.” 공자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뜻 있는 사(士)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고 하였다.  안중근의사도 스스로 의(義)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위 말씀을 붓글씨로도 남겨두었다.

▲ 한국 유학 정치에서 의(義)로움으로 목숨을 던진 중종 때의 참 선비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의 선비
 
우리말에서 선비는 ‘어질고 학식 있는 사람'을 말한다. 사(士)가 유교적 인격체로 파악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어의 ‘선비’가 지닌 성격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士)는 역사 속에서 신분적 의미로 많이 쓰였다. 사대부(士大夫), 사군자(士君子), 사서인(士庶人) 등으로 쓰였던 것이 그 예다. 선인들은 선비의 인격적 조건으로 생명에 대한 욕심도 초월할 만큼의 무소유의 덕을 요구했다.

‘선비'라는 어휘는 기록상으로《용비어천가》(1447, 80장)에 ‘션비’[儒生, 儒士]의 형태로 세종 시기(1418~1450)에 처음 기록상으로 나타났다.

“무공만 아니 위하사 선비(션비)를 알으실새 匪直爲武 賊識儒生… 토적에 겨를 없으시되 선비(션비)를 사랑할새 不遑討賊 且愛儒士 (《용비어천가》제 80장) 

세종은 재위 기간 동안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와 기구를 만들어 갔다. 더불어 의례제도를 유교에 기초하여 재편해가면서 학문에 밝고, 유교적 이념의 인재를 독려해 갔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도덕적으로 어진 인물'을 지칭하는 선비를 《용비어천가》를 통해 새롭게 정의하게 된다. 

이런 정의가 있기 전에도 태종 이방원은 선비의 전형적인 표본으로 정몽주를 사회적으로 추모하기 시작하며 동시에 정몽주를 추모한 선비 일파가 온건개혁파로서 지방에서 사림파를 형성하며 추모사업을 적극 뒷받침하기도 했다.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통해서 최초로 기록상으로 선비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선비는 유교사회에서 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의 인재들은 선비를 이상향으로 삼게 된 길을 추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는 새 나라 건설을 위해 태종의 강력한 왕권 강화정책에 따라 무(武)를 갖춘 인재보다 문을 갖춘 인재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는 경향이 남아 있었겠지만 이후 세종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문(文)을 더 장려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통용되고 있던 어휘를 재정의 하여 사회적으로도 공감을 바랐을 것이다.

참 선비는 단순히 공부만이 아니라 육예라 하여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학습하였다. 이는 각각 예학(예의범절), 악학(음악), 궁시(활쏘기), 마술(말타기 또는 마차몰기), 서예(붓글씨), 산학(수학)에 해당한다.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 인격체를 갖춘 학예일치의 인간상을 지향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세종은 ‘션비’라는 호칭을 썼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선비적 사풍을 지니고 문(文)과 물(物)을 아우르는 통유(通儒)가 되기를 바랐다. 

▲ 안중근 의사의 글씨 見利思義 見危授命.    

선비는 오늘날의 기회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인재들과는 구별된다. 선비정신은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기개, 옳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서는 사약도 마다하지 않는 불요불굴(不撓不屈)의 항상 깨어 있는 의식, 청정한 마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후 조선의 역사는 선비들이 주도하는 의로움의 역사를 써가게 된다. 이런 유학의 전통은 중종 때 정암 조광조로 이어지며 의(義)를 위해 희생되기도 한다. 한국 선비의 참 모습으로 남아 있다.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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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30 [22:54]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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