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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56 - 내가 대사헌(검찰총장)이 되면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10/30 [22:49]
세종 2년 2월의 어느 봄날 상왕과 세종이 무예훈련을 하며 사냥을 하였다.
 
이날 상호군 이상항(李尙恒)의 개가 먼저 노루 새끼를 잡았는데, 권희달의 개가 뒤쫓아 이를 잡다. 희달이 노복을 시켜서 이를 겁탈하니, 상항이 거센 소리로 희달을 욕하고 도로 그것을 빼앗다. 희달이 말하기를,
"내가 원컨대, 대사헌이 되면 이같이 무례한 사람을 징계하겠다."
고 하여, 보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2년2월13일)
 
그 당시도 지금의 검찰총장격인 대사헌이 큰 권력이었을 것이다. 노루 한 마리로 다투는 과정에서 화내면서 ‘대사헌이 되면’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요즘의 시국이 생각난다. 대부분의 생각에는 책임보다 자유를, 의무보다 권리를, 옳은 것보다 이익됨을 생각하기에 우선한다. 먼저 권리를 주장하고 자유롭고 싶으며 이익됨을 앞세우는 건 범인, 즉 보통사람들의 심정이다. 하지만 이럴 때 정의와 공정을 먼저 생각하고 실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울지도 가늠이 된다. 

더 나아가 먹고사는 문제와 맞물린 상황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무항산자는 무항심이요. 항산자는 항심이라. 무항산자라도 항심을 갖는 것을 선비라 한다’고 했다. 먹고사는 게 팍팍하면 이해관계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따라다니기에 부끄러움이 없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 만이 전부가 아닌 것을 배움은 가르쳐 준다. 

이해관계만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올바름이 이끌도록 하는 사람들도 실은 많다. 신념과 소명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비록 손해가 나더라도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선비라 한다. 노루 한 마리에 검찰총장이 돼서 혼내 주고 싶다고 하는 걸 보면 사람의 마음이란 게 허무하다. 그 다음날의 훈련에서는 호랑이도 사냥해서 바치기도 했다. 무예훈련은 흥이 올랐을 것이다. 
 
고려사 교정에 대해 묻고, 재이를 기록하게 하다.
정사를 보고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유관(柳觀)에게 《고려사(高麗史)》의 교정하는 일을 물으니, 관이 대답하기를,
"역사(歷史)란 만세의 귀감(龜鑑)이 되는 것이온데, 전에 만든 《고려사》에는 재이(災異)에 대한 것을 모두 쓰지 아니하였으므로, 지금은 모두 이를 기록하기로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든 선과 악을 다 기록하는 것은 뒤의 사람에게 경계하는 것인데, 어찌 재이라 하여 이를 기록지 아니하랴.” 하였다.(2년 2월 23일)
 
세종의 역사관이 잘 드러나 있다. 역사란 만세의 귀감이란 말로 전하는 경연관이자 고려사 교정담당 유관에게 답하는 대목은 사실을 적고 전하라는 명확한 답변을 내린다. 당시의 재이는 가뭄과 홍수 등과 같은 천재지변일 텐데 임금의 부덕함을 벌하기 위해 재난이 닥친다고 믿었던 시절이므로 재난과 이상현상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임금의 부덕을 감추는 효과를 갖고 있다. 하지만 세종은 그대로 적기를 명하니 이것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정신이라 볼 수 있겠다. 힘을 가진 한 사람의 지도자가 품게 된 분명한 입장과 목표가 수십 수백년 뒤에 당시는 생각도 못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종종 역사의 귀결이 된다.
 
선지(宣旨)하기를,
채방사(採訪使) 권탁(權卓)을 함길도에 보내어 금(金)을 캐게 하되, 윤정월 29일에 시작하여 2월 30일까지에, 역군이 대개 1천 29명인데, 얻은 금은 안변(安邊)에서 50냥쭝, 화주(和州)에서 29냥 5전쭝, 단천(端川)에 42냥쭝으로, 모두 1백 21냥 5전쭝이었다.(2년 3월 10일)
 
함길도는 함경북도와 남도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에서 금이 났다. 천명이 넘는 일군이 덤벼서 금을 캤는데 모두 4키로그램이 넘는 양이다. 당시 한 냥은 요즘 기준으로 10돈이고 무게는 37그램쯤 될 것이다. 그곳에는 지금도 혹 금맥이 있지 않을까. 북한은 지하자원의 보고라고 불리는 곳이니 관심이 크다. 얼마전 희토류의 채굴권을 중국에 이양할 수 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런 중요한 자원들의 자체적 이용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평화경제가 정착되고 경제적 공동체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집현전에 새로 영전사(領殿事) 두 사람을 정1품으로, 대제학 두 사람을 정2품으로, 제학(提學) 두 사람을 종2품으로 두되, 이상은 겸직이요, 부제학(副提學)은 정3품, 직제학은 종3품, 직전(直殿)은 정4품, 응교(應敎)는 종4품, 교리(校理)는 정5품, 부교리는 종5품, 수찬(修撰)은 정6품, 부수찬은 종6품, 박사(博士)는 정7품, 저작(著作)은 정8품, 정자(正字)는 정9품으로, 이상은 녹관(祿官)으로 하며, 모두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였다. 
부제학 이하의 낭청(郞廳)은 10명을 두되, 품에 따라서 임명하고, 차례대로 가리어 전임(轉任)하며, 각품에서 두 사람을 초과하지 아니하였다. 5, 6품은 부검토(副檢討)를 겸임하였다. 각품의 차례는 다 본 품반(品班)의 머리로 하였다. 제학과 부학의 서열은 사간(司諫)의 위로 하였다. 
박은·이원으로 영전사(領殿事)에, 유관·변계량을 대제학에, 탁신(卓愼)·이수(李隨)를 제학에, 신장(申檣)·김자(金赭)를 직제학에, 어변갑(魚變甲)·김상직(金尙直)을 응교(應敎)에, 설순(偰循)·유상지(兪尙智)를 교리(校理)에, 유효통(兪孝通)·안지(安止)를 수찬(修撰)에, 김돈(金墩)·최만리(崔萬理)를 박사(博士)에 임명하였다. 
처음에 고려의 제도에 의하여 수문전(修文殿)·집현전·보문각(寶文閣)의 대제학과 제학은 2품 이상으로 임명하고, 직제학·직전(直殿)·직각(直閣)은 3, 4품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러나,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이 오직 문신으로 관직을 주었을 뿐이었는데, 이제에 이르러 모두 폐지하고, 다만 집현전만 남겨 두어 관사(官司)를 궁중에 두고,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이에 채워서,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명하여 집현전에 적당한 수의 노비를 두게 하였다(2년 3월 17일)
 
드디어 집현전의 인원수를 정하고 관원을 임명했다. 세종 후반기 치세의 핵심인재들, 그리고 이후 세조까지 이어지는 인재들의 저수지를 세종 즉위 2년께에 조직을 정비한 것이다.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이름이 적힌 사람들 중에 뒤로부터 젊은 신진 관료들이다. 최만리는 한글창제와 반포 과정에서 세종과 격하게 논쟁한 사람이다.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공부하게 하여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게 했다. 이렇게 시작된 집현전은 세종후기 정치와 학문, 기술분야 인재의 중요한 공급처가 된다. 그 중에는 임금께 목숨 걸고 대항하는 사람도 있고 사육신도 나오고 생육신도 나온다. 변절자도 나오고 목숨 바치는 사람도 나온다. 사람이 모이면 어디나 이런 저런 모양이 있게 마련이다. 오늘도 그렇다.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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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30 [22:49]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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