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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아픈 기억, 기록해야 반복되지 않는다”
[인터뷰] 정병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여주시유족회장
 
송현아 기자   기사입력  2019/10/30 [13:12]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여주시유족회(회장 정병두, 이하 유족회)가 최근 한국전쟁 당시 여주지역 곳곳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희생에 대한 1차 증언 채록집을 발간했다. 민간인 학살이라는 민감한 화두를 정면으로 헤쳐 나가고 있는 정병두 회장(81)을 만나보았다. 정 회장은 더 이상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쟁의 참혹함을 기록으로 반드시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정병두 여주시 유족회 회장이 유족회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 세종신문


어린 시절 전쟁을 겪었다. 아버님은 어떻게 돌아가셨나?
 
나는 태어나 지금까지 80평생을 대신면 후포리에서 살았다. 우리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인데 집안은 어머니에게 맡겨두고 밖으로만 다니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전쟁 당시 인민위원회 사무를 맡아 보셨는데 9.28 수복 후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잡혀가 면사무소 뒤 창고에 갇히게 되었다. 하루는 형님이 준비해 준 주먹밥 세 덩이를 들고 아버지 면회를 갔는데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이거 먹을 사람이 이젠 없다고 하더라. 그땐 어릴 때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집에 와 형님에게 말했더니 형님이 막 울길래 그때서야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했다. 

후포리에서만 여덟 분이 재판도 없이 희생 당했다. 나머지 분들은 모두 시신을 찾았는데 우리 아버지 시신만 못 찾았다. 그게 가슴에 한으로 남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어떻게 살았나?

아버지가 인민위원회 부역 혐의로 돌아가시다 보니 ‘빨갱이’ 자식이라면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아버지 시신을 찾고 싶었지만 그 당시엔 친척들도 우리를 멀리했고 우리 형제는 너무 어렸다. 돌아가신 날도 장소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셨던 분 시신을 보통리 강변에서 찾았다는 말만 들었다. 아마도 아버지 일행이 그 곳에서 희생 당한 게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당시 후포리에서 학살당한 8명 중 7명의 가족은 모두 마을을 떠났다. 우리 형제는 갈 곳도, 할 일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남았다. 보통학교에 복학 했지만 월사금이 없어 더 이상 다니지 못했다. 형님이 머슴살이를 하면서 나를 먹여 살렸다. 빨갱이 자식 소리 듣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았다. 14살 때부터 송아지를 빌려 키웠다. 일 년간 송아지에 풀을 먹여 소로 키워주면 송아지 한 마리를 얻는 식이었다. 이웃의 도움을 받고 살아온 것에 보답한다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소송을 통해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았다는데.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고 살았다. 그러다 2009년 진실화해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여주지역 민간인 희생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여주군 전체에서 희생된 주민이 최소 98명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 발표 후 친구 동생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재판도 없이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진실을 밝혀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들에게 배상을 하라는 소송이었다. 이 소송에 전국에서 65명이 참여했는데 그 중 나를 포함해 7명만 배상을 받았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고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이라는 점을 인정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소송을 계기로 더 많은 이들의 억울함을 풀고 정부의 답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주유족회를 만들게 되었다.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여주시 유족회 정병두 회장.     © 세종신문


여주에서 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이 2천5백명이 넘는다고 들었다. 어떤 사연들이 있나.

진실화해위가 여주지역 조사를 했는데 학살지만 20군데 이상이었다.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대신면 창명학교 앞 새재골인데 대낮에도 총성이 울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 거적에 싸서 지게에 지고 가던 아버지도 똑같은 놈이라며 죽임을 당했는데 그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옆집 사는 사람이었다는 기막힌 사연도 들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70년 세월을 살아왔다. 한 동네 친구가 전쟁으로 인해 좌우로 갈라져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되었다. 전쟁이라는 게 얼마나 참혹한지. 

금사면 전북리는 당시 한달 이상 지속된 접전지역이었기 때문에 희생자가 아주 많다.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까마귀 떼가 하늘을 까맣게 덮고 피 범벅된 들개 무리들이 사체를 물고 끌고 다닌 모습을 목격한 유족은 지금도 개만 보면 몸이 덜덜 떨린다고 한다. 

양섬에서는 연합군의 전투기 폭격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증언을 듣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여주지역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수가 2천5백명이 넘지만 희생자 명단에는 250명만 있다.


최근 유족회에서 증언 채록집을 발간했다. 발간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아무도 얘기를 꺼내려고 하지 않아 채록 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조사원들이 얘기를 들어보려고 동네 경로당을 찾아가 말을 꺼내면 분위기가 냉랭하고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문도 안 열어주고, 조사원들한테 빨갱이라고 욕설도 하고. 다들 상처를 드러내기보다 묻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지 기억 자체를 꺼내기 힘들어한다. 그래도 어렵게 어렵게 누군가 얘기를 꺼내면 마을 안에서 함께 겪은 일이다보니 이야기가 쭉 이어진다. 그렇게 이번에 북내, 대신, 흥천, 금사, 산북지역 71명의 증언을 책으로 냈다.

▲ 여주시 유족회 정병두 회장과 함께 양섬 위령비를 찾았다.     © 세종신문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 기록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우리 유족회 회원들 나이가 대부분 80세 이상의 고령이다. 70명 회원 중 절반이 요양병원에 가 있거나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다. 역사의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유족들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급하다. 

여주 유족회에는 좌익에 희생당한 유족도 있고 우익에 희생당한 유족도 있다. 우리는 좌우를 떠나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기록을 남겨 이를 평화 교육의 자료로 사용하기를 원한다. 전쟁의 상처를 씻고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상처를 똑바로 쳐다보고 인정하고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면서 서로 화해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증언 채록은 바로 이러한 과정 중 하나다. 내년에는 나머지 지역의 조사를 진행하고 여주 전역의 채록을 모아 백서를 발간해 교육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증언 채록사업 외 계획하고 있는 사업은?

지난 12일 여주 양섬에 ‘평화의 눈물’을 상징하는 위령비를 세웠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경기도 최초의 위령비다. 위령비 주변을 소박한 추모공원, 평화공원으로 만들고 싶다. 뒤편에 돌아가신 분들 이름을 모두 새겨두면 그동안 성묘하러 갈 곳이 없었던 유족들이 이곳에 와 추모하고 위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평화의 메시지도 전달할 수 있으면 더 좋겠고.

채록사업 말고 또 중요한 사업이 바로 유해 발굴사업이다. 지난 2014년 국방부 유해발굴단이 능서면 왕대리에서 33구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민간인으로 판명 나 그해 6월에 첫 위령제를 지냈다. 그동안 충남 금산의 추모공원에 보존하고 있던 유해들을 작년에 여주박물관으로 모셔왔다. 아마도 민간인 집단희생지를 다니며 발굴작업을 하면 많은 유해들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 여주 양섬에 세워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에 묶인 리본 글귀를 살펴보고 있는 정병두 회장.     © 세종신문


여주시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유족회는 좌우 이념을 떠나 하나로 모였다. 처음엔 유족회 자체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시간들을 만들면서 여기까지 왔다. 

고령의 유족들이 다 돌아가시고 나면 젊은 세대들이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여주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전체 현황을 파악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해 그동안 움츠린 세월을 살아왔을 유족들이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시민들이 도와주었으면 한다.

억울한 죽음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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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30 [13:12]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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