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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48 - ‘500호 이상 고을에 선생을 파견하라’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08/22 [11:21]
▲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고려시대 불교가 정치와 유착하며 심각한 폐해를 일으키며 망조가 들게 만든 것을 직접 본 조선의 초기 집권세력은 불교에 대해 강력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불씨의 무리’라는 말로 폄하하며 불교와 승려, 사찰의 문제들을 논의하기를 자주하게 된다. 
이에 반하여 국가적 이념체계를 성리학(유학)으로 정한 조선은 유학의 보급과 확산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입장이었다. 태종에 의한 정치적 정지작업 이후 세종정치의 시작에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을 것이다. 그때 반가운 보고서가 하나 올라온다.
충청도 관찰사가 다음과 같은 청원을 올린 것이다. 세종1년 11월의 일이다.
 
충청도 관찰사 정진(鄭津)이 계하기를,
"선비를 가르칠 스승은 반드시 널리 두어서 인재를 교육하여야 하는데, 지금 지군사(知郡事) 이하 각 고을에 교수관(敎授官)이 없어서 배우는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생원 등은 모두 원점(圓點)을 얻기 위하여 성균관에 올라갔습니다. 유학(幼學)으로 학장을 삼는다 할지라도, 학생들이 모두 가볍게 여기니, 원컨대 교수·훈도관(訓導官)을 두어서 학교를 일으키기를 바랍니다."
하니, 조말생은 〈이를〉 불가하다 하고, 허조 및 원숙은 가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5백 호 이상되는 각 고을에 훈도관을 두되, 우선 3관(三館)의 권지(權知)를 파견하고, 생원·진사로서 남의 스승이 될 만한 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보증을 서고 천거하게 하여, 서울은 예조에서, 지방은 관찰사가 《사서》와 《이경(二經)》으로 시험하여, 후보자를 보고한 다음 〈교수관에〉 임명하여 보내는 것으로 영구히 정식으로 삼으라.” 하였다.(11/15)
 
상소내용을 자세히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유학을 국가이념의 근간으로 삼고 천년 기틀을 만들어야 한다면 국가백년대계로서 선비를 키워야 합니다. 선비를 키우려면 이를 교육하는 선생들이 곳곳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군 단위 이하의 고을에는 가르치는 선생들이 없어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걱정이 많습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배우고 가르칠 만한 사람(생원)들은 모두 성적(원점)을 받기 위해 한양의 성균관에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벼슬을 살지 않은 양반집 자손이나 선비라 일컫는 사람(幼學)을 선생(교수관)으로 삼으니 학생들이 모두 가볍게 여기고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바라건 데 나라에서 직접 선생들을 파견하여 학문을 가르치고 병사들을 훈련하는 학교를 두어 문무를 함께 익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야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문무 겸전의 수학이 가능한 학교체계를 만들어 가자는 보고서인데 기다리던 바를 콕 짚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임금 입장에서도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으리라. 임금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명령을 하달한다. 이것이 조선시대 지방 교육체계의 근간이 되고 나라에서 녹을 먹는 선생의 본격적인 출현이 된다. 
 
임금의 명령을 자세히 풀어보자.
‘500호 이상이 되는 고을에는 고을마다 가르치는 사람(훈도관)을 두어라. 우선은 한양의 3관(성균관, 승문원, 교서관)의 견습생(권지)들을 파견하라. (요즘으로 치면 성균관은 최고학부의 대학이고, 승문원은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관청이자 교육기관이고 교서관은 인쇄, 출판, 서적관리를 하는 최고 도서관쯤 된다.) 이 세 기관의 견습생들을 각 지역에 파견하고 각 고을의 생원/진사시를 합격한 사람들은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니 다른 사람의 추천보증을 받아 천거하게 하자. 이렇게 모인 사람들을 서울은 예조에서, 지방은 관찰사(도지사)가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와 이경(시경, 서경)으로 시험을 쳐서 기본실력을 확인한 후 교수관 후보자를 골라 임명하여 보내는 것을 정식 절차로 삼아라’라는 명령이다.
이야말로 교원공채의 시작을 알리는 내용이다. 이를 토대로 각 지역에 교육시스템이 정착되게 되었고 이것이 조선시대 국가교육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이제 나라에서 녹을 먹는 선생들이 500호 이상 되는 고을에 모두 파견되게 되었다. 
 
초기에 태종이 주도한 강상인 옥사사건과 장인 심온의 제거사건을 제외하면 정치범으로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에 반해 민간에서 일어나는 강력사건으로 인해 사형을 당하는 일은 꽤 많았다. 당장 같은 날 형조에서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정현 백성 성보개(成甫介)는 고의로 살인하였으므로, 참형에 처하고, 길주(吉州) 백성 최모지리(崔毛知里)와 해풍군(海豐郡)에 사는 사노(私奴) 오마지(吾麿之)는 사람을 구타하여 죽였으므로, 교수형에 처하고, 성주(成州)에 사는 사노 가언금(加言金)은 강도로서 참형에 처하였다.
형조에서 사형수에 대한 죄를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년에 사형수를 판결한 것이 30여 인이라, 죄수를 위하여 살리는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옳으니, 구형함을 고치라.” 하였다.(11/15)
 
당장 살인과 강도로 인해 일반백성과 노비들을 교형(목메어 죽이는 형벌), 참형에 처했다. 그런데 이렇게 사형을 당한 사람이 30여인이라니 한달에 3명꼴로 사형을 집행하게 된다. 임금은 ‘죄수를 살리는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나중에 나오는 발언이지만 ‘한번 끊어진 팔다리와 목숨은 다시 이을 수 없다’며 사형집행을 신중하게 하기를 당부한다. 올해는 더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도록 구형(형을 선고하는 것)을 고쳐서 죄를 감해주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러한 내용들이 쌓이며 세종의 마음속에는 저런 잘못을 저지르는 백성들을 가르칠 만한 좋은 방도는 없을까를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다. 세종 16년에 만들어진 삼강행실도는 이러한 사건들을 대하는 마음이 쌓여서 만들어진 책일 것이다.
 
며칠 후 또 한가지 사건이 보고된다. 
 
상왕이 회암사(檜巖寺) 중들의 간음·절도 사건을 논의하다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경험으로 보면, 대신(大臣)을 대할 때와 소환(小宦)을 대할 때가 다르다. 저 중들이 항상 부녀와 가까이 있었으니, 어찌 능히 범하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중들로 하여금 비자(婢子)를 부리지 못하게 하는 법을 세우려고 한 것도 이 까닭이었다. 비자는 먼 곳에 살게 하고 노자(奴子)를 윤번으로 부리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상책이 있으니, 다만 전토만 주고 노비를 없애면, 어찌 이런 폐단이 있으리오. 중들이 비록 친히 나무하고 밥을 짓더라도 또한 가한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나갔는데, 유정현·박은·이원·변계량·허조·조말생·원숙은 남아있게 하여, 좌우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절의 노비를 없애는 것은 내가 평소에 하고자 한 것이나, 다만 이 무리들이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가,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사건과 같은 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갑자기 개혁하지 못하고 도리어 중들을 사역하지 말게 하여, 그 마음을 위로하였던 것이다. 이제 〈노비 폐지를〉 자취(自取)하였으니, 또 누구를 원망하리오. 대간을 시켜 상소하게 하고, 의정부와 육조에서도 노비 폐지를 청해야 할 것이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다만 비자(婢子)를 혁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이원이 그르게 여기고, 임금도 또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27)
 
노회한 정치가 상왕 태종의 입장에서는 이 역시 기다리던 참이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불교 승려들의 네트워크가 탄압에 의해 문제를 일으킬까 싶어 조심하며 개혁을 미루고 있었는데 도리어 그 빌미를 제공했으니 이제 할 때가 되었다는 얘기다.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와 청산의 강력한 재료이다. 이로부터 사찰과 불교 혁파가 시작된다. 
 
지금 우리는 일본과 무역전쟁이라 일컬을 만한 긴장상황을 보내고 있다. 그간 잊었거나 몰랐던 상황을 갑자기 깨우치게 되는 것들이 많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잔재와 토착왜구들, 이념을 이용한 기득권유지세력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분단의 고착화를 원하는 세력, 과거 박정희 정권의 보이지 않았던 일본의존정치와 경제, 대한민국의 보수를 자처하지만 실은 일본과 긴밀한 이익관계에 메여 있는 자칭보수들, 그동안 일본에 의존해왔던 기업의 편안한 타성 등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보이기 시작했다. 
때는 지금이다.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전개할 독립의 기회이자 한반도 평화를 통한 대륙과의 통합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인것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3.1운동의 주역이 일반 백성이었 듯이 불매운동의 주역도 국민들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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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8/22 [11:21]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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