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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선과 원칙의 임금, 세종대왕
잘 알려지지 않은 세종대왕 이야기 17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07/25 [14:42]
“법을 세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법을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세종22년 8월)” 

600여 년 전 세종대왕이 한 말로, 그는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세종대왕은 스스로 철저하게 법을 지킴으로써 법에 대한 원칙을 확고히 했다. 세종8년 전국적인 가뭄으로 ‘금주령’을 발동할 때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름 사람들에게 술을 금하는 것이 옳겠는가?”라며, 스스로 준법의지를 준행했다. 왕이라는 특권 의식으로는 국가를 경영함에 있어서 원칙도 위엄도 서지 않을 뿐 아니라, 힘없는 백성들을 범법자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시행에 있어서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세종10년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내가 술을 마시지 않고 백성들에게 금한다면 금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먼저 솔선해서 실천하겠지만, 백성들에게는 형벌을 가볍게 하고 금하는 것을 느슨하게 하는 것도 가뭄을 구하는 하나의 정치이니 금주령을 내리지 않는 것이 옳다”고 했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가뭄에 손이 모자라 다들 힘든 상황에서 금주령을 내려 위반자를 옥에 가두는 것은 국가경영의 현실 대응 방안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종의 원칙론은 실제 그 자신이 뛰어난 자질과 높은 인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욱 겸손하고 항상 강한 책임감을 느낀 데에서 잘 드러난다. 세종대왕은 과묵했으며, 경우에 따라서 최소한의 의사표현으로 최대한의 의사가 전달되도록 하는 방식을 취했다.

국가적인 법을 운용함에 있어서 세종대왕은 말만 앞선 것이 아니라 솔선하여 행동으로 보여주었는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원칙을 지키도록 하였고, 냉정할 때는 그야말로 추상과 같았다. 세종10년 5월에 한 노비가 광화문의 종을 쳐 원통함을 호소한 일이 있었다. 그가 광화문의 종을 친 이유는 의금부의 당직 관원들이 신문고를 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었는데, 이 사실을 보고받은 세종대왕은 신문고를 치지 못하게 한 당직 관원을 사헌부에 내려 신문하게 하고 관직에서 파직시켰다. 또한 세종대왕이 평소에 아꼈던 집현전 응교 권채(사가독서 최초 수혜자)가 본부인의 비첩(婢妾) 학대문제를 교묘하게 숨겼을 때에도 원칙에 의거해 처리하였다. 세종대왕은 자신에게 ‘추상’과 같이 대함으로써 스스로 백성을 대신해 국가를 경영하는 ‘위민 군주’의 모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스스로 근신하며 솔선수범하였으며,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되 그 중심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의 정신이 있었다.  

세종신문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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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7/25 [14:42]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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