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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 45-죄 없는 자가 손해를 보느니 죄 있는 자가 벌을 받지 않는 것이 낫다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07/25 [14:39]
▲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한달여간 한양을 들쑤시던 명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매일 문안을 해야 하고, 잔치를 차려주어야 하고, 이러저러한 요구들에 응대해야 했다. 명나라 사신단이 가지고 온 물건은 한양의 저자거리에서 상인들에 의해 매매가 이루어졌을 것이고 또 조선의 주요한 물품들을 사들여 갔을 것이다. 사신의 두목인 황엄이 개인적으로 받아 간 것 만도 수십 마리의 말에 싣고 가야 할 정도였으니 전체 사신단의 물품규모는 엄청난 양이었을 것이다. 
사신단이 돌아간 다음날인 9월 19일, 아침부터 임금은 정사를 보았다. 
지금의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대사헌 신상(申商)이 임금께 아뢴다.
 
“지금 보니, 내자시(內資寺)의 천과 재물이, 비가 자주 새어서 많이 썩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관리가 감독 검찰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썩은 물건의 〈값을〉 갈라서 징수하도록 하십시오.”
 
내자시란 조선시대 왕실에서 소용되는 각종 물품을 관리하던 곳이다. 일반 옷감부터 쌀, 국수, 술, 간장, 기름같은 일반적인 생활용품들이다. 보고내용을 보건데 이 물품들이 비가새서 물건들이 많이 상했다는 보고이자 관리감독을 맡았던 사람들에게 물품값을 변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신상과 임금, 김점이란 신하의 대화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거의 관리가 한 사람이 아니니, 어찌 한 사람 한 사람한테서 받아낼 수 있겠소. 하물며 그 가운데에는 그 자리에 오래 있지 않은 자들이 무척 많지 않소."
신상이 답하여 아뢰기를,
“지난해 여름에는 비바람이 심했는데, 관리 노릇을 하는 자가 그것을 감독 검찰하지 못한 것은 그 죄가 적지 않습니다. 법률 조문에, ‘모든 창고의 재물은, 그것을 지키는 소임을 맡은 사람이 손상과 파괴를 초래하면, 절도범으로 다루고, 〈손상 파괴된 재물을〉 다 배상하여 관에 내놓는다. ’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만약에 〈오손된 물건 값을〉 징수하지 않으면, 뒷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줄 길이 없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벼슬을 산 일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갈라서 징수하면 되오."
김점(金漸)이 아뢰기를,
“만약에 벼슬 산 일수의 다과를 가지고 갈라서 징수한다면, 혹 5, 6일만 벼슬 산 자도 생길 것이니, 5, 6일 안에야 어찌 창고에 들어 있는 재물을 감독 검찰해 낼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15일 이상 벼슬 산 자한테서 징수해야 합니다."
다시 상(商)이 아뢰기를,
“벼슬 산 일수의 다과를 가지고 갈라서 징수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고 하겠사오나, 만약에 전연 징수하지 않는다면, 관리 노릇을 하는 자들이 겁낼 것이 없어질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징수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소.” 하였다.
 
왕실물품의 창고관리는 왕정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조달청창고와 같은 것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물품의 종류와 수량이 많으니 그것을 일일이 다 세밀히 챙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비가 들이치고 물이 새는 상황인 경우에는 책임소재가 국가에 있지 않겠는가. 
결론은 썩거나 망가져서 손해본 물품을 창고지가 공무원들에게 다 물어내라는 제안이다. 사실 이것이 공무원인 관료입장에서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세종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나 보다. 논의하던 신하들이 다 물러가자 임금이 비서실장인 원숙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지금 사헌부에서는 내자시(內資寺)의 손상 파괴된 물건들을 징수하려고 하는데, 만약에 깡그리 징수하자면, 이루 다 징수해 낼 수 없을 것이고, 죄 있는 자를 골라서 징발하려면, 손상과 파괴를 초래시킨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니, 〈이 일을〉 장차 어떻게 처리 하여야 하오.”
 
모든 물건을 다 담당 공무원들에게 복구시키라고 한다고 해서 복구될 일도 아닌 것이고, 모든 공무원들에게 다 일괄로 물어내라 하는 것도 형평에 어긋나며, 별도로 누가 가장 큰 원인제공자인지를 파악하자면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니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를 묻는다. 이때 비서실장 원숙의 대답이 임금의 마음에 들었다. 역시 비서실장은 업무 보좌뿐만 아니라 심리보좌까지 해야 한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숙이 답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자주 관대하신 은혜를 내리셨으며, 거기다 지난날의 관리들은 고의로 손상과 파괴를 초래시킨 것이 아니오니, 그 정상은 용서해 줄 만합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깡그리 다 징수한다면, 무죄한 자가 반드시 거기에 끼어들게 될 것이니, 〈무죄한 자들한테서까지〉 다 징수할 바에야, 차라리 죄 있는 자한테서 징수하지 않느니만 못하오. 사헌부에다 징수하지 말도록 시키시오.” 하였다.
 
이 대목에 세종정치의 특별한 점이 있다.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본때를 보여야 할 때가 있다. 권력의 서슬 퍼런 칼날을 한번쯤 휘둘러 보고싶은 생각은 어느 권력자나 모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죄 없는 자들까지 끼어들어 억울함이 있게 된다면 아예 죄 있는 자들이 죄를 받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말이 현재 법체계에서 범인을 놓치더라도 억울한 누명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안된다는 사상의 세종식 판단이자 실천이었다.
 
같은 날의 업무장면을 하나 더 보자.
국가소유의 토지인 공전(公田)과 개인소유의 사전(私田)에서의 수확량을 토대로 세금 매기는 일에 대한 논의이다. 의견을 올리는 김점이란 신하는 말이 지루하고 사심이 있는 사람이다. 발언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 ‘풍년에는 지주에게 맡겨’ 자기 땅의 소출량을 스스로 검사하게 해서 신고한다는 발상인데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될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소출을 줄여 신고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김점이 아뢰기를,
“올해의 공전(公田)의 수확 실태를 현지 검사할 때에 사전까지 함께 현지 검사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옵건대, 작년의 사전 현지 검사 위임관들은 모두 다 용렬해서 잘된 것을 못 된 것으로 하여, 대소의 신료들의 전조(田租) 들여온 것이 심히 적어, 서울의 쌀 값을 오르게 만들었습니다. 또 과전(科田)이, 이미 영구히 하사해 준 것인 바에야, 그 땅의 수확 실태의 현지 검사를 지주에게 맡기는 것이 만세를 두고 〈변하지 않는〉 법이라고 하겠사옵고, 만약에 부득이 하다면, 흉년에는 경차관(敬差官)에게 맡기고, 풍년에는 지주에게 맡기면 될 것입니다. 올해는 오곡이 퍽 잘되었사오니, 지주를 시켜서 현지 검사케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경차관이란 수시로 특수임무를 들고 각 지역에 파견되는 요즘으로 치면 특사이거나 특임관리 정도 되겠다. 주로 임금의 명령을 정확하고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 자주 활용되었다. 
이어서 임금이 답한다. 

“공전과 사전은 다 나라의 땅이니, 수확 실태의 현지 검사에 다른 점이 있어서는 아니되오. 내가 듣기로는, 옛날에는 공전의 현지 검사는 경차관에 맡겼기 때문에 허위와 소략을 초래한 일이 많았고, 사전은 지주에게 맡겼기 때문에 각박한 사례가 많았다는 거요. 올해는 공전과 사전의 〈수확 실태의 현지 검사는〉 다 경차관에게 맡기고, 경차관이 떠날 때에 재삼 타일러서 실제와 꼭맞는 검사를 하도록 힘쓰게 한다면야, 어찌 사전에서만 다 허위와 소략을 초래하게 되겠소. 하물며 주·현마다 위임관이 많지 않은데도, 오히려 맞지 않는 자가 생기는데, 전지(田地)를 받은 각품의 관원이 시키는 현지 검사하는 종들이야 어떻게 그들이 민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하겠소. 만세를 두고 〈변치 않는〉 법을 만들려고 한다면, 경차관을 시켜서 현지 검사케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오.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 것은 오랫동안 전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 풍년과 흉년을 어찌 달리 보겠는가. 금년에 쌀이 귀한 것은 오로지 흉년이 든 까닭이오. 사전(私田)에서 걷은 조(租)의 소입(所入)이 적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리라.” 하였다.
 
공전과 사전은 다 나라의 땅이라는 토지 공개념이 있다. 때문에 검사방법도 달라서는 안된다. 객관적으로 보증될 만한 방식을 써야 ‘만세를 두고 변치 않는 법’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리더는 부하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기는 하지만 중요한 결정 앞에서는 원칙을 지키는 분명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 세종은 그 부분에서 강한 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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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7/25 [14:39]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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