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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44-‘〈얼마가 되든지〉 다 보낼 지어다’
 
김태균   기사입력  2019/07/22 [14:31]
▲ 김태균 세종신문 대표
대국을 섬긴다는 사대의 입장에서 조선에 오는 명나라의 사신은 국가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손님 맞이이자 국가행사가 된다. 이때 사신은 명조정의 공식적인 입장을 갖고 오기도 하지만 황제의 개별적인 요청도 갖고 오고 사신의 개인적 욕심도 가득 채운 게 된다. 

세종 즉위에 대한 ‘윤허’의 차원에서 온 이번 사신단은 평소의 사신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리고 사신은 온갖 요구를 하며 조정을 괴롭히기도 하는데 그 사신이 누구냐에 따라 경중이 다르다. 세종1년 8월에 온 황엄은 토색질이 몸에 밴 인물이다. 당연히 조정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다.  그래서 조정의 주요관리와 임금의 측근들이 모두 나서서 융숭한 대접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사신은 황제의 칙명을 전했다. 명의 영락제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부처의 사리가 조선에 있음을 알고 그것을 다 달라고 한 것이다. "칙명으로 사리(舍利)를 구해 오라 하시었는데, 내가 늙고 또 병들어서 빨리 서울로 돌아가야 하겠으니, 속히 주었으면 좋겠다.” 고 하자 조정은 바삐 전국에 사람을 보내 사리를 구하거나 바치라고 연통을 날렸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별도로 구해 두었다고 알려진 흥천사의 사리가 좀 아까웠다. 믿을 만한 내시를 시켜 밤에 몰래 사리를 좀 빼다가 궁궐 내불당에 옮기는 작업을 했다. 
 
전에 태조께서, 속설로서 전하는 석가 여래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이[齒]에서 나온 사리(舍利) 네 개와, 두골(頭骨)과 패엽경(貝葉經)과 가사(袈裟) 등을 흥천사(興天寺) 석탑 속에 두게 하였는데, 내시 김용기(金龍奇)에게 명하여 밤에 석탑에서 옮겨다가 내불당에 두게 하고, 그 대신 석가 여래 두골에서 나온 사리 네 개를 탑 속에 두게 하였다.(1년 8월23일)
 
그 사이 황엄은 명에서 데리고 온 양을 조선에 주었고 조정은 이 양을 일정 직급이상의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잘 기르도록 했다. 재미있는 일은 새끼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세금으로 정한다. 
 
황엄이 어사(御賜)한 양 1천 52마리를 전해주고 돌아와서 전상(殿上)에 올라 가서 차를 대접받고 나갔다. 두 임금도 궁전으로 돌아가 어사한 양을 각 관사에 나누어 주어서 기르게 하였다.
하사한 양(羊)을 현관으로는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이상, 전직(前職)은 종2품 이상의 관료에게 나누어 주되, 정1품 이상은 각각 2마리씩, 그 나머지는 각각 1마리로 하고, 또 암수 60여 마리는 맡아 기르기를 자원하는 자에게 주되, 새끼 2마리를 낳으면 하나는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8월 27일)
 
그리고 전국 사찰에 흩어져 있던 사리가 한양으로 모여든다. 사리를 구하기 위해 각 지역에 나간 명에 따라 ‘각도 절의 승려들이 계속해서 부처의 뼈와 사리를 헌상하여 오므로 문소전(文昭殿) 불당에 모아 두게 하였다.(8월 27일)
 
그런데 그 과정에서 밤중에 몰래 흥천사의 사리를 내불당으로 옮긴 것을 불편히 여긴 세종은 어전회의에서 논의를 한다. 귀중한 진품사리를 좀 남겨두고 나머지를 전부인양 보내는 것이 적절치 않았던 모양이다. 세종의 정치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 이런 것이다. 사사로운 것, 누군가를 속이는 것, 에둘러 모른 척하는 것들을 무척 불편 해 한다. 진심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못 견딘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조께서 석탑 안에 두었던 사리는 일찍이 내불당으로 옮겨왔었는데, 내가 그것을 모두 진상하여 바치려 하오. 만일 모두 바치지 아니하면, 이것은 하늘을 기망하는 것이 될 것이오.(8월 30일)
 
아직 그 상황을 모르는 사신 황엄은 흥천사에 가서 공양하고 그곳에 남겨둔 사리를 공손히 대하며 사리의 내력을 물었다. 그러자 원숙은 모른 척 내력을 말해 둔다. 이 상황을 상왕 태종과 세종이 보고를 받자 부끄럽다며 사실을 다 말하고 다 바치는 것이 어떻겠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신하들은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고 조금 나누어 감춰 둔 것은 말하지 않으면 모를 것이니 이대로 가자는 의견을 내지만 상왕은 사소한 일로 외교의 심각한 후유증을 염려한다.
 
상왕이 임금과 함께 원숙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사신이 사리를 보고 공경을 다하였다 하니, 내 마음에 스스로 부끄럽다. 당초에 생각하기를, 석탑에 두었던 네 개는 석가 여래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이 위에 났던 것이므로, 태조께서 가져다 두신 것이라 하여 가만히 석가 여래의 정수리뼈에서 나온 것으로 바꾸었더니, 이제 도리어 생각하니, 황제께서 그 사실을 모르시고 예배하여 신앙하시며 공경을 다하신다면, 이것은 내가 하늘을 속이는 것이 될 것이오, 또 태조께서 비록 계신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바치셨을 것이니, 의당 사실대로 황엄에게 고할 것이니, 사신에게는 불가불 사실대로 고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9월1일)
 
사신에게 사실을 고하고 내용을 설명하자 흔쾌히 인정한다. 아마도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고 어떻든 황제에게는 “이게 전부입니다” 하고 보고하는 것으로 매듭지을 생각이었나 보다. 하지만 황엄 입장에서는 이런 트집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더 많은 토색을 하기에 좋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엄이 말하기를,
"내 마땅히 아뢰어서 석탑에 있던 것과 왕궁에 두었던 사리를 모두 다 올리게 하였으니, 반드시 변명하실 것도 없고 의심하고 염려하실 것도 없습니다. 한 4일 지나서 나아가 노왕께 뵙고 사리와 두골을 보겠습니다.” 하였다.(9월2일)
 
이러한 논의가 한참 이루어지던 중 한 승려 축구(竺丘)가 ‘영험스러운 사리를 다 바치지 마시고 국가의 보호를 위해 남겨두시면 좋겠다’는 건의가 김점에 의해 보고된다. 하지만 임금의 태도는 일관되었다. 
 
임금이, “승려들은 혹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으나, 국가의 체통으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니, 천자가 사리를 구하신다면 당연히 본국에서 보장하고 존경하던 것을 바쳐서 지성인 것을 표시하여야 할 것인데, 황차 석탑의 사리는 천자께서도 이미 아시는 바인데, 어찌 그것이 영검하고 이상하다는 옛 물건이라 하여 몰래 감추어 두어서 위로 천자를 속일 수야 있겠는가. 이제 비록 그 사리를 바친다고 하여도 우리 나라에는 아무런 재화나 괴변이 없을 것을 보증하겠으니, 경은 염려하지 말라.” 고 하시니, 점이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9월 6일)
 
이제 본국으로 돌아갈 날이 몇일 남지 않았다. 황엄은 힘껏 사적 축재를 위한 토색의 본색을 드러낸다. 같이 온 젊은 사신 왕현을 시켜 남산에 제사 지내게 하면서 자신은 모사를 꾸민다. 이때 왕현이 한마디 한다. 다음날은 짐이 많으니 소와 말을 내달라고 청한다. 보수를 낸다고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겠는가.
 
현이 술이 얼근하여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엄이 나를 나가 놀게 하고서 많은 뇌물을 가만히 받아먹으려고 나를 꺼리는 것이 심하여졌다.” 하였다.(9월 10일)
짐을 싣고 갈 소와 말을 청하면서  "내가 거저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보수를 낼 것입니다.” 라 하였다.(9월 11일)
당시 보내 준 물건들과 식품들은 퍽 많았으나, 황엄은 그래도 토색하여 마지않았다. 임금은 그의 마음을 맞춰 주려고 〈그가 달라는 물건을〉 다 보내 주라고 명 하였다.(9월 16일)
 
결국 사신은 떠나고 조선의 진골사리 558개가 모두 명으로 갔다.
 
상왕과 임금이 모화루(慕華樓)에서 그들을 전송하고, 사리(舍利)를 〈명나라 황제에게〉 진상하게 하였다. 그 주문[上奏文]에 말하기를,
‘조선국의 석탑과 사탑(寺塔) 속의 사리는 그 수효가 몇 개임을 묻지 말고 〈얼마가 되든지〉 다 보낼 지어다. 그리고 다른 절 안에 있는 사리도 보낼 지어다.’ 하여, 이 뜻을 받들어 신의 아비와 신은,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원민생을 시켜 받들어 가지고 흠차관과 함께 가서 진상하게 하였으니, 사리의 수효는 총 5백 58개의 존귀한 알이오.” (9월 18일)
 
외교는 어렵다. 사대와 실용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타야 할 줄이 여러 겹이다. 제각기 셈법이 다르다. 그리고 다시 남북의 평화와 공동체로의 회복도 해야 한다. 갈 길이 쉽지 않지만 지혜를 모아 해 나가야 할 일이다.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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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7/22 [14:31]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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