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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교린외교
잘 알려지지 않은 세종대왕 이야기 ⑮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06/25 [14:56]
세종대왕은 1418년 8월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교서에서 조선을 ‘작지만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대외정책인 명나라와의 ‘강대국 동맹노선’을 계승하겠다고 밝혔는데, 무리한 영토 확장 정책으로 온 나라를 전쟁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나라 안팎으로 평안하고 나라의 창고가 넉넉하며 오랑캐들이 와서 복종하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게 젊은 군주 세종대왕의 생각이었다.

세종대왕은 나라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 한 일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부왕 태종과 마찬가지로 중앙군을 두텁게 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둘째는 사군육진 개척과 파저강 토벌, 그리고 화학무기의 혁신적 발전 등을 통해 북쪽 변방의 방위력을 높인 것이었다. 셋째로는 태종 때의 사병혁파 이후 병조 중심의 군령체계를 정비하고 국방을 강화하였다.

흔히 조선시대의 군대는 중앙의 국왕 호위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전투경찰’ 수준에 불과했다거나, 십만 명도 안 되는 군대를 가지고 명나라의 안보우산에 기대어 존속하는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종대왕 시대의 경우 국왕 호위부대 외에도 압록강-두만강 연안에는 3만 명  가량의 막강한 군사력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한양 도성의 시위군사 2~3만 명을 포함해 전체 육군의 수는 16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49년 전국의 병력을 파악한 결과 동원 가능한 육군의 병력 수는 평안도와 함길도를 제외한 상태에서 현역군은 13만여 명으로 파악되었다. 여기에 함길도와 평안도의 병력을 합치면 16만여 명이 실제로 동원 가능한 병력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이외에도 수군의 수는 5만여 명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를 토대로 추산해 보면 세종시대는 조선조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육군(16만)과 수군(5만)을 거느린 부강한 나라였다. 당시 조선의 국방력은 김종서 장군이 말하듯 은혜와 힘을 겸비한 교린외교, 즉 “은혜가 없으면 그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위력이 없으면 그 뜻을 두렵게 할 수 없다(세종 18년11/9)”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도 세종대왕은 변방이나 이웃나라에 들어가 기밀을 캐오거나 적을 암살하는 첩보부대를 양성하였는데, 그 수가 5,540명에 이른다(세종 28년). 특히, 적국에서 위험한 일을 할 사람은 사형수 중에서 적국의 길을 잘 알거나 담력이 좋은 사람을 뽑아 훈련을 시켜 파견하기도 하였다. 150년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선조는 무능하였으며, 관리들은 부패하고 제대로 된 군사를 양성하지 않았다. 세종대왕의 국방에 대한 기본정신인 은혜와 힘을 겸비한 교린외교를 추진했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전쟁이었다. 

세종신문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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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6/25 [14:56]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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