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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 가죽공예로 새 인생 시작했다”
[인터뷰] 이필재 가죽공예 작가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19/05/16 [12:05]
여주 공예인들을 대상으로 8회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 네 번째로 강천면 도전리에서 가죽공예를 하는 ‘필공방’ 이필재 작가를 만나보았다. 이 작가는 강천면 도전리에 ‘공예인 마을’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 여주시 강천면 도전리에서 가죽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이필재 작가.     © 세종신문


여주에 오긴 전에는 어떻게 지냈나?

나는 1952년 성남에서 태어나 서울과 성남을 오가며 살았다.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회계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태권도 사범도 잠깐 했다. 탤런트 천호진이 당시 내 제자였다. 태권도는 학생시절 건달들이 자꾸 괴롭히길래 몰래 배워 공인 4단까지 땄다.

대학 졸업 후 상장회사에 취직하여 회계 업무를 봤는데 선배를 잘 만나 많은 것을 배웠다. 


여주와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89년 성남에 있는 우리 산이 시에 수용되면서 받은 돈으로 강천면 도전리에 산을 사뒀다. 부모님은 바로 도전리로 들어오셔서 자그마한 오두막을 짓고 살고 계셨다.

나는 1990년에 회사를 퇴직하고 옷감을 수입하고 자동차부품을 수출하는 무역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잘되어 1997년에는 연매출 50억을 찍었다. 당시 회사 비용으로 전 직원 가족들과 함께 동남아시아로 7박8일 여행을 다녀왔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해 11월 IMF가 터지고 사업이 주저앉기 시작했다.

사업을 계속 하다가는 부채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것 같아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도전리로 내려왔다. 당시에는 나만 내려왔고 1년 후 아내도 내려왔다. 여주에 땅을 마련한 것은 1989년이었지만 내려와 살기 시작한 것은 1997년 11월 30일 부터다. 


가죽공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무신출신이었고 몇 대 전부터는 기능과 재능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뭔가를 만들고 움직이는 것이 체질에 맞는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용인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 제각을 지은 대목수인 도편수이셨다.

사업을 할 당시 나도 통나무집 만들기와 목수 일을 취미로 배웠다. 1998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당시 서울에 있는 한국전통공예학교에서 소목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였다. 그 때 스승이 무형문화재 55호 박명배 선생이셨다. 소목 일을 계속하고자 했지만 선생님께서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고 하지말라고 하셨다.

98년 가을 무렵 청주비엔날레에 구경을 갔다가 그 곳에서 가죽공예를 하는 송혜경 선생을 만났다. 가죽은 내가 그 전에 사업을 하면서 한동안 취급하던 제품이라 관심이 갔다. 여주에서 청주를 왔다 갔다 하며 가죽공예를 2년간 배웠다. 2003년 도전리에서 가죽공예를 하는 ‘필공방’을 시작하였다.  

▲ 이필재 작가가 운영하고 있는 '필공방'에 전시된 가죽공계 작품들.     © 세종신문


가죽공예의 역사와 전통이 어떻게 되나?

인간이 동물을 사냥하고 동물의 가죽을 가지고 옷이나 생활용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죽공예는 시작되었다. 전통적으로는 동물 가죽을 말려서 안쪽을 칼로 수십 번 긁어서 부드럽게 만든 후 사용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공업적으로 화학약품과 열처리를 통해 간편하게 해결하고 있다.

가죽 중에는 뭐니 뭐니 해도 악어가죽이 최고로 좋다. 그 다음으로 타조가죽을 쳐준다. 일반적으로는 소가죽, 양가죽, 돈(돼지)가죽을 많이 사용한다.

우리나라도 가죽공예의 역사가 아주 깊고 최근에는 가죽공예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얼마 전 탤런트 최민수 씨가 가죽공예로 오토바이 관련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는 것이 방송에 나온 후 가죽공예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우리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농악반 동아리활동에 푹 빠져 있었다. 당시 아버지께서 서울에 오셨다가 장손이 농악반을 한다는 것을 아시고는 말도 없이 헛기침 한 번 하시고는 바로 시골로 가버리셨다. 농악반을 광대라고 여기시고 언짢게 생각하신 거다. 그러다 아들이 한예종에 입학하고 학교친구들과 함께 이곳 도전리에서 아버지 칠순잔치 축하공연을 했는데 손주의 공연에 환한 미소로 박수를 치고 계신 아버지를 보고 난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손자가 광대짓 하는 게 싫다고 돌아서시더니 환하게 웃고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시는 모습에 묵고 묵은 나의 원망이 폭발한 것이다. 그 충격으로 나는 공황장애를 앓게 되었다.

‘필공방’을 처음 열고 한 5년 동안 집안에서 가죽공예만 하며 지냈다. 그러다 2007년 당시 농업기술센터 장해중 소장을 만나 지금의 오곡나루축제 전신인 ‘진상명품전’에 초대받았다. 그 곳에서 사농 전기중 선생을 비롯한 지역의 문예인과 공예인들을 여러 명 만났는데 지금까지 절친한 벗으로 지내고 있다. 2007년은 가죽공예를 가지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난 첫 해다. 


가죽공예를 하면서 어려울 때는 없나?

가죽공예를 하면서는 오직 ‘무심신공’에 빠져들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다. 가죽공예 그 자체에서 오는 어려움 보다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이 더 크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 화합하고 소통만 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나. 그게 언제나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

처음 만든 핸드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송혜경 선생으로부터 가죽공예를 전수 받고 처음 만든 것이 일명 ‘보스턴 가방’이다. 이 가방은 아내에게 선물하려고 만들었는데 아내가 잘 안 쓰려고 해서 내가 보관하면서 전시도 한다. 그 가방을 사고 싶다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그때 마다 팔지 않는 가방이라고 말해 준다. 일주일 내내 제단하고 손바느질해서 만든 작품인데 지금도 그 가방을 보면 남다른 감정이 든다. 
 
▲ 이필재 작가의 첫 가죽공예 작품은 아내에게 선물 하기 위해 만든 보스턴 가방이다.     © 세종신문


여주에서 가죽공예를 하며 살기가 좀 어떤가?

여주는 정말 살기 좋은 고장이지만 지역색이 너무 강한 곳이다. 20년이 넘게 여주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가죽공예와 같이 특이한 직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여주사람들과 어울리기 더 어려운 것 같다. 다른 지역도 별 다르지 않겠지만 여주가 특히 외지 사람들이 적응하기 어려운 곳 같다. 


여주를 예술의 도시, 공예의 도시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전라도 광주에 가면 공예인의 거리가 있다. 지역의 다양한 공예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데 지역주민들과 관광객들이 구경도 하고, 사고 싶은 것도 사고 그런다. 여주에도 충분히 그런 곳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나서는 정치인이나 선구자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강천면 도전리에 공예인촌을 만들고 싶다.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땅에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공예인촌을 꾸려가고 싶다. 도전리는 서울, 원주와도 가깝다. 계곡을 따라 시냇물이 10km이상 흐르고 경치도 좋고 공기도 너무 좋은 곳이다. 공예의 땅 도전리를 만들고 싶다. 그 꿈이 꼭 현실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공예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지만 아직까지는 쉽지 않다. 나는 가죽공예로 돈버는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가죽공예를 할 때 마다 몰입되는 내 자신이 좋고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것 자체가 좋다.

얼마 전 억대 연봉을 받던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퇴직하고 나서는 텔레비전 리모컨만 만지며 살았다고 한다. 그 친구가 세상을 뜨기 전 왔다간 적이 있는데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 자기 스스로 일하며 살 수 있는 뭔가 하나는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여주에서 공예인들이 공예작품으로 먹고살려면 협동조합 같은 것을 만들어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작품만 만들고 그것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사람으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관광패키지 상품을 만들어 티켓 한 장이면 여주에서 관광도 하고 대중교통도 이용하고 사고 싶은 도자기나 공예품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도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놀이공원 자유이용권과 같은 것을 여주에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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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16 [12:05]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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