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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35-‘그들을 토벌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하랴’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05/08 [15:30]
▲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개인에게도, 국가에도 정체성이란 게 있다. 그것은 대부분 과거의 기억에 의존한다.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그 기억이 어떻게 체계화되었는지가 바로 정체성을 결정한다. 그래서 역사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양이다. 우리가 공통으로 기억하는 과거가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60년대 생은 대부분 중학교 1학년때 역사교과서를 접했다. 교과서의 초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930여회 외세의 침략을 받았지만 단 한번도 남을 침략한적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란 대목이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게 평화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힘이 없는 공동체가 감내해야 할 찌질한 운명을 포장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사실 이게 사실이라면 후자가 맞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세종 1년 5월 초에 발생한 비인현(충남 서산지역)의 왜구 출몰사건으로 촉발된 조정의 대책논의는 결국 대마도 정벌이라는 논의로 확대되었고 태종의 화끈한 성격에  맞도록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한달도 걸리지 않은 정벌전쟁을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여러 정황속에서 태종의 대마도 정벌에 즈음한 반포교서와 군대의 규모, 그리고 대마도에서의 정벌성과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겠다. 세종 1년, 1419년 6월 9일 실록은 태종의 정벌에 대한 변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정벌의 정당성을 위한 문장의 구조도 볼만하고 그 사이사이에 있는 당시의 표현 방법 등이 이채롭다. 
 
상왕(태종)이 중외(中外)에 교유하기를,
"병력을 기울여서 무력을 행하는 것은 과연 성현이 경계한 것이요, 죄 있는 이를 다스리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으로서 부득이한 일이라, 옛적에 성탕(成湯; 성광과 탕왕)이 농사일을 제쳐 놓고 하(夏)나라를 정벌하고,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6월 같이 더운 때에 흉노를 토벌했으니, 그 일에 있어 비록 대소는 다름이 있으나, 모두가 죄를 토벌하는 행동은 한 가지라. 
대마도는 본래 우리 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1410년, 태종 10년)으로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 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뜻 있는 선비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탄식하며,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 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 대왕이 용이 나는[飛] 천운에 응하여 위덕이 널리 퍼지고 빛나서,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해 주시는 덕을 입어 그렇지 않으리라 믿었더니, 그러나 그 음흉하고 탐욕 많은 버릇이 더욱 방자하여 그치지 않고, 병자년(1396년)에는 동래(東萊) 병선 20여 척을 노략하고 군사를 살해하니, 내가 대통을 이어 즉위한 이후, 병술년(1406년)에는 전라도에, 무자년(1408년)에는 충청도에 들어와서, 혹은 운수하는 물품을 빼앗고, 혹은 병선을 불사르며 만호를 죽이기까지 하니, 그 포학함이 심하도다. 
두 번째 제주에 들어와 살상함이 많았으니, 대개 사람을 좋아하는 성낸 짐승처럼 간교(姦狡)한 생각을 숨겨 가지고 있는 것은 신과 사람이 한 가지로 분개하는 바이지마는, 내가 도리어 널리 포용하여 더러움을 참고 교통하지 않았노라. 그 배고픈 것도 구제하였고, 그 통상을 허락하기도 하였으며, 온갖 구함과 찾는 것을 수응(酬應)하여 주지 아니한 것이 없고, 다 같이 살기를 기약했더니, 뜻밖에 이제 또 우리 나라의 허실을 엿보아 비인포(庇仁浦)에 몰래 들어와서 인민을 죽이고 노략한 것이 거의 3백이 넘고, 배를 불사르며 우리 장사(將士)를 해치고, 황해에 떠서 평안도까지 이르러 우리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며, 장차 명나라 지경까지 범하고자 하니, 그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며, 하늘의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게 함이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내가 삶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어버리는 것을 오히려 하늘과 땅에 죄를 얻은 것같이 두려워하거든, 하물며 이제 왜구가 탐독(貪毒)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여, 뭇 백성을 학살하여 천벌을 자청하여도 오히려 용납하고 참아서 토벌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랴. 
이제 한창 농사짓는 달을 당하여 장수를 보내 출병하여, 그 죄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아아, 신민들이여, 간흉한 무리를 쓸어버리고 생령을 수화(水火)에서 건지고자 하여, 여기에 이해(利害)를 말하여 나의 뜻을 일반 신민들에게 널리 알리노라.” 하였다. (세종 1년 6월 9일)
 
국가의 힘을 모아 병선과 병사들을 출정시키는 데에는 명분과 실리라는 두가지 기둥을 붙잡아야 했을 것이다. 태종의 출정교서에는 군왕으로서 솔직한 심정을 녹여내고 온 백성이 함께 뜻을 모을 만한 감성적 공감의 문장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비인현 왜구사건으로부터 논의가 되어 온대로 이미 책임자는 삼군 도체찰사로 이종무 장군이 맡고 출정을 했다. 교서반포를 한 8일 뒤인 17일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가 9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도를 떠나 바다 가운데로 나갔다가, 바람에 거슬려 다시 거제도에 와서 배를 매니, 병선 수효가 경기도 10척, 충청도 32척, 전라도 50척, 경상도 1백 26척, 총계 2백 27척이고, 서울로부터 출정 나간 모든 장수 이하 관군 및 따르는 사람이 6백 69명이고, 갑사·별패·시위·영진속(營鎭屬)과 자기가 모집한 건강한 잡색군(雜色軍)과 원기선군(元騎船軍)을 병합하여, 1만 6천 6백 16명이니, 총수가 1만 7천 2백 85명이므로, 65일 양식을 싸 가지고 행진하였다.(1년 6월 17일)
 
각도에서 모아들인 병선이 모두 227척이며 병사가 1만 7천명을 넘는다. 규모가 크다. 마음먹고 대마도를 접수하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대마도의 규모나 성과에 비하면 조금 과한듯도 하다 그리고 한번 출정했다가 풍랑이 세서 거제도로 다시 귀환한 사실도 이채롭다. 결국 3일 후인 6월 20일에 대마도에 상륙해서 일정한 전공을 올린 바를 기록했다. 
 
오시(午時)에 우리 군사 10여 척이 먼저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섬에 있는 도적이 바라보고서 본섬에 있는 사람이 득리(得利)하여 가지고 돌아온다 하고, 술과 고기를 가지고 환영하다가, 대군이 뒤이어 두지포(豆知浦)에 정박하니, 모두 넋을 잃고 도망하고, 다만 50여 인이 막으며 싸우다가, 흩어져 양식과 재산을 버리고, 험하고 막힌 곳에 숨어서 대적하지 않거늘, 먼저 귀화한 왜인 지문(池文)을 보내어 편지로 도도웅와에게 깨우쳐 이르나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우리 군사가 길을 나누어 수색하여, 크고 작은 적선 1백 29척을 빼앗아, 그 중에 사용할 만한 것으로 20척을 고르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라 버렸다. 또 도적의 가옥 1천 9백 39호를 불질렀으며, 전후에 머리 벤 것이 1백 14이요, 사로잡은 사람이 21명이었다. 밭에 있는 벼곡식을 베어버렸고, 포로된 중국인 남녀가 합하여 1백 31명이었다. (1년 6월 20일)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는 것은 찌질한 우리라는 인식을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의 잔재일 것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말은 ‘힘없는 자들은 그냥 가만히 있으라’란 주장과 같다는 느낌이다. 
 
우리는 그런 민족이 아니다. 에너지와 열정이 뛰어나고 수많은 난관을 헤쳐온 역사가 있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였지만 고대사는 우리를 더 큰 세상으로 안내하는 거울이 된다.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대미 사대주의 세력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우리민족 또는 국가의 평화와 통일을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우리를 다시 들여다볼 일이다. 뱀같은 지혜의 외교와 비둘기 같은 순결한 이상을 함께 가져야 할 즈음이다. 태종은 ‘대마도는 본래 우리땅’이라고 했다. 그런데 독도까지 자기들 땅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일본의 태도에서 대마도의 왜구의식이 중첩되어 보인다. 응징은 우리의 평화와 통일이 아닐까.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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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08 [15:30]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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