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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각에는 한민족의 얼이 담겨있다”
[인터뷰] 박춘수 철공예·서각 작가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19/05/02 [13:22]
여주 공예인들을 대상으로 8회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한다. 그 두 번째로 점동면에서 ‘철공예’와 ‘서각’을 하는 박춘수(65) 작가를 만나보았다. 박 작가는 철공예와 서각을 후대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무거운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 점동면에서 철공예와 서각을 하는 박춘수 작가.     © 이재춘 기자


여주와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나는 1955년에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자랐고 14년 전 우연히 여주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88올림픽을 전후로 수석이 유행했는데 충주호에서부터 이포까지가 수석산지였다. 충주 능암 일대에 수석을 전문으로 하는 공예인들이 모여 수석가게를 하였는데 유행이 지나면서 수석에 뿌리공예와 목공예가 결합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충주 능암 일대가 목공예거리로 조성되어 있다. 목공을 하다보면 가끔 철공예가 결합되는데 능암에 잠깐 일을 하러 갔다가 몇 년 동안 그곳에서 철공예를 하게 되었다. 나는 주로 정원용 철공예품을 생산하였는데 고객이 대부분 양평에 있었다. 집은 장호원인데 양평과 장호원 중간정도 되는 여주에 작업장을 차리게 되었다.  


철공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리 둘째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철공예를시작했으니까 한 20년 되는 것 같다. 열일곱 살 때부터 용접 일을 시작했으니까 철을 다룬 것은 50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중학교 때 그림을 그렸다.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예술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께서 극구 반대하셔서 농고를 갔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농고를 다니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자퇴를 하였다. 그리고 집에 있으면서 가끔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는데 맨날 욕을 먹었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기 딱하셨던 어머니께서 심부름을 핑계로 서울 누나네로 보내셨다. 그 당시 우리 큰매형이 영등포에서 산업철공 공장장을 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께서 큰매형에게 미리 연락을 했는지 큰매형은 나보고 시골에 내려가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며칠 누나네 있었는데 어느 날 큰매형이 공장에서 일을 해 보겠냐고 물어봐서 해보겠다고 했더니 아는 사람이 공장장으로 있는 인근 회사에 취직을 시켜주었다. 그 당시 용접공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대체로 거칠었다. 공장장이 그 사람들을 휘어잡으려고 험악하게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큰매형 밑에 있으면 서로 곤란해진다고 다른 공장에 소개해 준 것이다. 그렇게 용접일을시작해 오늘  이렇게 철공예를 하는 사람이 되었고 이제는 우리 아들이 가업으로 이어가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

나는 철공예도 하고 서각도 하는데 공예인들은 모든 작품에 혼을 담는다. 매 작품 하나하나가 다 생각과 사연을 담고 있다. 그래도 하나 꼽으라고 하면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비’ 서각을 말하고 싶다. 나는 여주에 오기 전부터 고달사지에 꼭 가보고 싶었다. 고달사지는 국보4호 ‘쌍사자석등’이 있고 ‘원종대사혜진탑비’ 등 유물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나는 원종대사혜진탑비를 서각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 비석은 받침대는 거북이고 상판은 쌍용인데 그 문양이 정말 독특하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서각으로 만들었다. 문양과 음영을 그대로 반영하기 위해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다. 서각을 위한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비석이 오래되어 문양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품을 많이 들였다. 

▲ 박춘수 작가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꼽은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비’ 서각.     © 이재춘 기자


작품 활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사실 철공예와 서각을 할 때는 조금도 힘들다는 생각을 안 한다. 철공예나 서각이 힘이 많이 드는 일이지만 젊은 시절 산업적으로 철을 만질 때 하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산업으로 철을 만질 때는 목숨을 내 놓고 해야 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 우리 둘째가 대학을 졸업하자 산업 철공 일을 그만 두고 늘 하고 싶었던 철공예를 시작했다. 지금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내 마음대로 하는데 힘든 일이 뭐가 있겠나.


아들이 가업으로 철공예를 물려받았는데….

우리 아들은 전기가 전공이었다. 전기회사에 다녔는데 어느 날 내가 아들에게 전기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냐고 물었다. 아들 대답이 별로 자신 없이 들렸다. 그래서 내가 철공예를 배우면 평생 먹고 살 수 있으니 한번 배워보라고 했다. 한번 배우면 최소한 3년은 배워야 한다고 했다. 내 밑에서 철을 다루는 일을 3년 배우면 어디 가서 취직 하는데 문제가 없으니 3년 해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리고 5년을 하면 공장 하나는 맡아서 할 수 있다고 했다. 내 일을 그대로 물려받아 스스로 꾸려가려면 최소한 10년은 배워야 한다고 했다. 아들이 선뜻 받아들여 철공예를 가업으로 물려주었다. 아들이 철공예를 가업으로 물려받은 지 7년 되었는데 5년이 되었을 때 아들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증을 따로 냈다. 지금은 내 사업은 내가 아들사업은 아들이 하고 있다. 

 
세종인문도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세종인문도시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여주가 우리 문화와 우리 활자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이 높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2016년 여성회관 전시실에서 내가 철공예와 서각 전시회를 했는데 시에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세종문화재단에서 여주 공예인들을 지원한다고 신청하라고 해서 나도 신청을 했는데 퇴짜를 맞았다. 이유는 내가 여주에서 10년이 넘도록 공예를 하고 있지만 주소지가 타지로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이해가 되면서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내 철공예 작품이나 서각이 다른 지자체에는 나가는데 정작 여주시가 주문하는 경우는 한 건도 없다. 흥천면에서 정자 현판하나 주문 들어온 것이 전부다.


여주에서 작품 활동을 하기가 어떤가?

여주는 지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공예활동을 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다. 그러나 행정의 지원은 불모지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공예인들은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그래야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모습으로 공예활동을 계속 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여주시가 행정적으로 조금만 이끌어 주면 공예인들은 더 잘 할 수 있다. 여주에는 공예인들이 제법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공예인들은 여주의 문화생산자들이고 문화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인들이 여주를 더 가치 있는 문화도시, 인문도시로 만드는데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공예인들의 가능성에 여주시가 관심을 돌리기를 바란다. 


▲ 박춘수 작가가 작업하고 있는 여주시 점동면 철사랑 공업사.     © 이재춘 기자
 
철공예와 서각을 언제까지 할 계획인가?

할 수 있을 때 까지 할 생각이다. 내가 어렸을 때 그렇게 하고 싶었던 미술을 가정형편이 어려워 포기하였는데 그것이 한이 되어 결국 서예를 배웠고 그 서예가 철공예와 결합되어 서각으로 나의 관심을 이끌었다. 나이 들어 배우기 시작한 서각이지만 미친 듯이 배우고 연습하였다.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각을 나의 제2직업을 만들어야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는데 ‘미치지 않으면 목표에 미치지 못 한다’는 말이다. 철공예와 서각은 나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옛날 방식이라 별로 쓸모가 없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한민족의 얼과 정신이 담겨있다. 후대들에게 물려줄 뭔가를 내가 해야 한다는 무거운 사명감을 느낀다. 철공예와 서각은 내가 할 수 있을 때 까지 할 것이다. 

 
청년들이 철공예나 서각으로 먹고살 수 있나?

서각은 사실 전문 기능인이 아니면 먹고살기 어렵다. 그러나 철공예는 배워두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철은 우리 인류에게 가장 실용적이고 유익한 금속이다. 지난 수천 년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수천 년 동안 철은 인류의 가장 친근한 금속이 될 것이다. 예전에는 철이 산업용으로만 주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철이 생활 속 곳곳에서 쓰이고 있다. 철의 쓰임새는 정말 방대하다. 철만큼 영구적이고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소재가 흔치 않다. 철로 직업을 선택하다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여주에 산업이 별로 많지 않은데 여주의 청년들이 철을 가지고 도전한다면 새로운 직업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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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02 [13:22]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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