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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있는 사람을 찾아 기른다
세종 철학의 힘 : 생생[거듭살이]의 삶을 찾아서 ③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04/28 [13:25]
▲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정치는 사람들의 미래의 삶을 풍족하게 하기 위한 일이다. 정치의 주체가 사람이고 그 목표도 사람이다. 사람이 귀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세종 시대의 인재 정치는 현명하거나 재능 있는 사람을 찾고자 했다.
 
민과 소민, 그리고 다양한 민의 모습 

민(民)은 ‘백성 민’으로 사람을 가리킨다. 세종실록에서 국역으로 나타난 ‘백성’의 총 횟수는 2,667건이다. 민(民)이든 인(人)이든 인민이든 백성으로 나타낸 용어가 많다는 증거다. 

농사가 주업인 세종 초 백성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여러 고통 속에서 살아갔다. 인민은 농사가 주업인 관계로 가뭄이나 장마, 한파 등으로 인해 류민(流民), 유민(遊民), 부민(浮民), 그리고 때로 란민(亂民)이 된다. 백성은 몸으로 농사를 짓거나 여타 산업에 종사하는 로민(勞民)이다. 이밖에도 학대 받는 학민(虐民)이 있고, 재산을 세금으로 더 빼앗기는 박민(剝民), 그리고 어린아이의 뜻인 적자(赤子)를 굶는 중으로 부르고도 있다.
사회적으로 힘없는 하층의 개념으로는 하민, 소민, 소인, 평민 등이 있다. 먼저 하민은 ‘아래 계층’ 즉 하층민의 사람들이다. “하민들의 바람에 보답하오면, 여염(閭閻)이 재활하고 민덕(民德)이 후하여질 것이다.”(세종실록 13/4/6)

‘소민’에 대하여는 비교적 여러 예가 나온다. 그 주요 정의는 침학 받고(虐小民)(세종실록 2/11/7), 일이 없고(小民全失産業)(세종실록 4/3/27), 자연히 소민은 원망이 많다. (小民多怨)(세종실록 7/8/26) 이에 무지하니 임금을 착하지 않다고도 말한다.(無知小民以我爲不善)(세종실록 6/4/17) 

“대저 소민들은 본디 항심(恒心)이 없으므로, 진실로 유사(有司)가 징수하고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능히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세종실록 17/12/14) 소민을 성격적인 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치는 소민을 구제하고 품어야 한다. “백성의 생활이 염려스러우니, 환상(還上)과 진제(賑濟)를 시기에 맞추어 나누어 주어서 소민들을 구제하여야 한다.” (세종실록 9/2/7)

정신적으로 하위에 있다는 뜻으로는 우민愚民이 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故愚民有所欲言.” (세종실록 28/9/29) 그러나 우민愚民의 훈민정음 해석은 다르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는 우민愚民을 ‘어린 백성’으로 풀고 있다. 한자는 우愚이지만 우리말은 ‘어린’이다. 이는 ‘어리다’, ‘여리다’, ‘순수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 대한 명칭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적으로 백성에 대한 진단과 대응이 다양하다는 것을 뜻한다. 세종의 정치에서는 굶는 백성에게 구휼을, 무지한 백성에게는 교화를, 재생의 기회를 가지려는 백성에게는 화육을 통한 화민 정책 등을 펼친다. 

조금 번다하다싶을 정도로 여러 민에 대한 용어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바로 부가설명 없이 명칭 자체만으로도 당시 민의 상황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소민과 하민이라도 재능 있으면 살려야

그밖에 순수한 백성의 뜻으로 백정(白丁)이 있다. 재인, 화척, 백정에게도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은 갑사직에 서용하고 있다. “재인과 화척(禾尺)은 본시 양인으로서, 업이 천하고 칭호가 특수하여, 백성들이 다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고 그와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니, 진실로 불쌍하고 민망합니다. 비옵건대, 칭호를 백정이라고 고쳐서 평민과 서로 혼인하고 섞여서 살게 하며, 그 호구를 적에 올리고, 경작하지 않는 밭과 묵은 땅을 많이 점령한 사람의 밭을 나누어 주어서 농사를 본업으로 하게하고, 사냥하는 부역과 버들그릇[柳器]과 피물(皮物)과 말갈기와 말총, 힘줄[筋]과 뿔 등의 공물을 면제하여 그 생활을 안정케 하고, 그 가계가 풍족하고 무재가 있는 자는 시위패(侍衛牌)로 삼고, 그 다음은 수성군(守城軍)을 삼으며, 그 가운데에도 무재가 특이한 자는 도절제사로 하여금 재능을 시험하여 본조에 통보하여 다시 시험케 한 후 갑사직(甲士職)에 서용하고,.(세종실록 5/10/8)

이 계(啓)에 세종 시대의 사회 분위기가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재인이나 화척은 본래 양인인데 천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으니 이들을 ‘백정白丁’(순결한 장정의 뜻이 후대에 변질되었다)이라고 불러 평민들과 결혼할 수 있게 하자고 한다. 그밖에 농사를 짓게 하되 무재武才가 있으면 갑사직에 서용하라고 한다. 
세종의 사람에 대한 태도는 임현사능(任賢使能) 정신이다. “어진 이를 임명하고 유능(有能)한 인재를 부리는 일이다.”(세종실록14/4/28) 

  
▲ 장영실 동상     © 네이버캐스트


임현사능(任賢使能)의 인물 장영실

강력한 신분제도를 바탕으로 한 양반 중심의 사회를 유지했던 조선 시대에 천민은 백성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하지만 천민을 백정, 즉 순수한 민으로 여기고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주고자 했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대표적인 인물이 세종 시대의 장영실이다. 

농경사회였던 시절에 세종은 근대적 농법을 보급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을 제작함으로써 시기에 맞는 파종과 추수를 가능하게 했다. 국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곧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최적의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조선 최고의 발명가로 거듭난 장영실이 있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항주 출신의 망명객 귀화인이다. 어머니가 관기(官妓)였으므로 관청에 소속된 관노가 된다. 이후 세종의 부름으로 장영실은 1421년(세종 3년), 윤사웅과 함께 북경에 가서 관성대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관성대는 13세기 원나라의 곽수경이 만든 동양 최대의 천문대로 각종 천문기기를 통해 천문을 살피는 장소였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각종 천문기기를 제작했던 것이다. 세종은 여러 대신들의 공론을 거쳐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 벼슬을 내렸다. 

세종 16년(1434년) 7월 1일에 세종은 자격루를 조선의 표준 시계로 선포했다. 그때부터 자격루에서 시간을 알려주면 궁궐 밖에 있는 종루에서 북이나 종을 쳐서 오정(낮 12시)이나 인정(밤 10시경) 등의 시각을 알려주었다. 

세종은 재능이 있는 장영실을 위해 신분을 변경시키고, 중국에 파견하여 기술을 습득케 하고, 일할 지위 부여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신분의 벽을 넘어 사람을 고르고 일을 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세종의 ‘사람 중심의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

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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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4/28 [13:25]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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