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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33-‘전함을 두는 것을 폐지하면 어떨까?’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04/15 [14:33]
▲ 발행인 김태균     
1419년, 세종1년 5월 5일에 비인현 도두음곶에 왜구의 노략질 사건이 터졌다. 수십명의 병사들과 수백명의 주민이 죽고 다쳤다. 그 와중에 김성길은 부상을 당하고 아들은 아비가 죽은 줄 알고 물로 뛰어들어 죽었다. 왜구들은 쫓겨 가는 듯했으나 북쪽으로 올라가 연평도와 백령도까지 노략질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태종은 급히 병조와 관련한 원로회의를 소집하고 대마도 정벌계획을 논의한다. 아직 세종은 수습임금의 자리에 있으니 참관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상왕과 임금이 심히 근심하여…  박은·이원 및 조말생·이명덕을 대궐로 불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섬멸한 뒤에 물러서서 적의 반격을 맞을 계책을 밀의하고, 밤늦게야 파하였다.(세종1년 5월 13일)
 
밤 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나온 다음날 아침 정사를 보는데 세종이 의외의 제안을 한다. 전함을 폐지하고 육지만 지킬 것을 제안한 것이다. 사실 이때까지도 모든 병권은 태종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간밤에는 대마도를 칠 계획을 숙의한 다음날인데 의아하다. 아직 칼과 창이 부딪는 살벌한 현장을 보지 못한 심약한 문사로서의 연약한 임금의 면모가 보이는 대목이다. 결국 전함폐지안은 슬그머니 없어진다. 초보임금 세종의 성급한 제안이었던 것으로 매듭지어진다.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각도와 각 포구에 비록 병선은 있으나, 그 수가 많지 않고 방어가 허술하여, 혹 뜻밖의 변을 당하면, 적에 대항하지 못하고 도리어, 변환(邊患)을 일으키게 될까 하여, 이제 전함(戰艦)을 두는 것을 폐지하고 육지만을 지키고자 한다."
하니, 판부사 이종무와 찬성사 정역(鄭易)들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바다에 접해 있으니, 전함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전함이 없으면, 어찌 편안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지강(李之剛)이 아뢰기를,
"고려 말년에 왜적이 침노하여 경기까지 이르렀으나, 전함을 둔 후에야 국가가 편안하였고, 백성이 안도하였나이다.” 하다. (세종1년 5월 14일)
 
같은 날 이어지는 회의에서는 다른 신하들까지 합세하여 대마도 정벌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조말생은 곧 병조판서가 되는 인물이며 병권을 행사함에 있어 매우 뛰어난 자질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종대의 조말생은 뇌물로 인한 탄핵으로 많은 망신을 당한 인물이다. 특이한 점은 한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비교하기도 했다. 

이 논의에서 우리가 익히 들어봄직한 지명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거제도를 본진으로 하고 견내량에서 집결해서 거사를 도모한다는 내용이다. 약 170년 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의 거제도, 견내량과 같은 곳이며 이종무가 전체 군사의 책임을 맡았다.
 
두 임금이 유정현·박은·이원·허조(許稠)들을 불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치는 것이 좋을까 어떨까."
를 의논하니, 모두 아뢰기를,
"허술한 틈을 타는 것은 불가하고, 마땅히 적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서 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 유독 조말생만이,
"허술한 틈을 타서 쳐야 합니다."
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금일의 의논이 전일에 계책한 것과 다르니,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漢)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허술한 틈을 타서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처자식을 잡아오고, 우리 군사는 거제도에 물러 있다가 적이 돌아옴을 기다려서 요격하여, 그 배를 빼앗아 불사르고, 장사하러 온 자와 배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구류(拘留)하고, 만일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베어버리고, 구주(九州)에서 온 왜인만은 구류하여 경동(驚動)하는 일이 없게 하라. 또 우리가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은 불가하니, 후일의 환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
하고, 곧 장천군(長川君)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명하여,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 척과 여러 방면의 병사들과 기술자들을 모은 가운데에서 배 타는 데 능숙한 군정(軍丁)들을 거느려, 왜구의 돌아오는 길목을 맞이하고, 6월 초8일에 각도의 병선들을 함께 견내량(見乃梁)에 모여서 기다리기로 약속하였다.(세종1년 5월 14일)
 
국가에서도 왜인들의 동향을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귀화한 왜인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백성’ 이라는 명백한 입장정리를 하고 왜구침입에 대한 대비의 포석과 세금면제라는 당근까지 제시하며 우대하기도 했다. 

병조에서 계하기를,
"각 관에서 안치한 왜인이 마음대로 출입하는 자는 가두어서 이를 위에 알리게 하고, 만일 수령을 능욕하거나 횡패(橫悖)하는 자가 있거든, 곧 크게 징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좇았다.(5월 15일)

병조에서 계하기를,
"이제 왜구가 바야흐로 성하여 간첩이 있을까 두려우니, 요해지(要害地)를 지켜 행인들을 점검하고 문빙(文憑;문서로 보여지는 증빙) 이 없는 자는 그 자리에서 곧 체포하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5월24일)
 
이어 임금이 선지하기를,
"여러 섬의 왜적들이 기근으로 매년 양식을 구걸할 때면 곧 급여하기도 하였고, 또 우리의 변읍(邊邑)에서 장사할 것도 허락하였으니, 그들이 살게 된 것은 전혀 우리 나라의 은덕이어늘, 이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변민들을 침략하여도 모른 체 하였으나, 이제 도리어 군사를 일으켜, 우리 충청도 도두음곶이를 침략하여, 우리 인민들을 죽이고 병선을 불살랐으며, 또 우리 황해도 해주 지경에 와서 도적질까지 하니, 전에 이미 우리 나라에 와서 귀화한 왜인들은 곧 우리 나라의 백성이라. 그 이름을 따로 밝혀 등록하게 하고, 각 포구의 병선에 분배하되, 집마다 세금을 면제하고, 그 이름을 적어서 알릴 것이며, 이중에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을 후히 줄 것이다.” 하였다.(세종1년 5월 15일)
 
백령도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도두음곶에서 도망한 왜구들과 백령도에서 맞부딪혔다. 전황이 좋았다. 2척이 2척을 만나 한 척을 사로잡고 이후 두 척이 다시 추가돼서 한 척을 더 포획했다. 총 16명을 죽이고 26명을 사로잡았으며 나머지는 도망하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우리 해군(선군)은 두 명이 전사했다.
 
박영(朴齡)·성달생들이 급히 보고하기를,
"윤득홍·평도전들이 처치사(處置使)와 더불어 백령도(白翎島)에 이 달 18일 미시(未時)까지 모이어 협공할 것을 기약하여, 득홍이 병선 2척으로 먼저 백령도에 이르렀다가, 적선 2척을 만나서 싸우니, 도전도 병선 2척을 거느리고 달려와서 협공하였다. 때는 신시이다. 왜놈이 탄 배 1척을 잡으니, 이는 곧 적의 괴수가 탔던 배이다. 적은 대개 60여인이 있는데, 득홍이 13급을 베고 8인을 사로잡았으며, 도전은 3급을 베고 18인을 사로잡으니, 나머지는 빠져 죽었고, 남은 배는 구름이 어른어른하는 지평선에 보일락말락 남으로 향하여 달아났다."
하니, 두 임금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진무 김여려(金汝礪)를 보내어, 하사하시는 술을 받들어 득홍과 도전을 그 있는 곳에 가서 위로하게 하였으며, 각각 옷 한 벌씩을 하사하고 힘써 싸운 사람의 성명을 기록하여 올리게 하였다. 선군 중에 죽은 두 사람에게는 임금이 명하여 부의을 보내고 복호(復戶)하게 하였으며, 소재지 수령관으로 하여금 매장하고 표목(標木)을 세우게 하였다.
이어 선지하기를,
"사로잡힌 왜인 26인 중에서 사정을 아는 자 3인만은 머물게 하고, 나머지는 다 도착한 곳에서 베게 하되, 만일 당인(唐人)이 섞여 있으면, 아울러 죽이지는 말라.” 하였다.(5월 23일)
 
좋은 성과였다. 어쩌면 이러한 전황들이 대마도 정벌에 자신감을 더 불어넣어 주었을 수 있다. 세종대의 대외정벌은 세종1년 태종이 주도한 대마도 정벌과 이후 세종이 주도한 여진정벌이 있었는데 어쩌면 이런 과정에서 세종은 군사훈련의 중요성을 체험하고 김종서, 최윤덕 같은 마음을 나누는 무관들을 중요하는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 

역사의 의외성에는 오늘 우리가 사는 삶의 의외성과 동일하다. 해적질을 한 해적들은 단순한 노략질이었는지 몰라고 이 이면에서는 국가에 귀화한 왜인에 대한 영향과 본토정벌이라는 나비효과까지 몰고온 셈이다. 태종은 역시 결단이 빠른 최고의 리더 임금인 셈이다.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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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4/15 [14:33]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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