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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은 신들린 무당과 같다”
[인터뷰] 코미디언 정귀영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19/03/08 [15:55]
여주의 문화예술인들의 삶을 알아보고자 코미디언 정귀영(59) 씨를 만나보았다. 정 씨는 코미디언은 관객의 삶이 자신들에게 빙의해야 그 관객과 진심으로 공감하는 무당과 같은 직업이라고 하였다.   


▲ 코미디언 정귀영 씨     ⓒ세종신문


여주와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나?

우리 집안은 600년 전부터 흥천면 다부리(다대리)에서 살았다. 고려 말 정몽주파에 속했는데 탄압에 쫓겨 흩어질 때 여주로 들어왔다고 들었다. 14대조께서는 직조장이라는 관직에 있으셨는데 국가에서 관리하는 술을 맛보는 일을 하셨다고 한다. 직조장은 당시 고을 원님과 같은 지위였다고 하니 꽤 높은 벼슬이다. 우리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시면서 인천으로 나가 사셨는데 그래서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여주는 봄에 시제를 지내거나 명절날 차례를 지내기 위해 매번 왔던 곳이다. 2005년에 차를 타고 연라리 근처를 지나다 내가 꿈속에서 보던 집이 있어 알아보니 마침 집아 나왔다고 해서 그 집을 샀다. 어머니를 모시고 여주로 이사를 왔고 우리 집 옆 빈집 한 채를 더 사서 부산에 살고 계신 장인, 장모님도 모시고 왔다. 내가 여주로 돌아와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생각했다. 

 
개그맨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지금은 개그맨이라고 하지만 우리 때는 코미디언이라고 불렀다. 방송국에서는 ‘코미디탤런트’라고 하였는데 우리말로 희극배우를 말한다. 초등학교 때 꿈이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었다. 대선배님이신 ‘땅딸이 이기동’의 흉내를 내면서 코미디언을 꿈꿔왔다. 대학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코미디언을 준비했다고 볼 수 있다. 1981년 MBC 3기 코미디탤런트로 시작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코미디탤런트가 KBS, MBC 두 곳 밖에 없었고 대부분이 월급을 받았다. 20대 초반에 코미디언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한 40년 했다. 


코미디언 생활 40년은 어땠나?

젊었을 때는 꿈과 열정을 불태웠다.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것보다 코미디언이라는 그 자체에 젊음을 통째로 불태웠다고 해도 된다. 우리 같은 코미디언은 나이가 들면 국민들에게 사랑과 봉사를 베푸는 즐거움으로 살아야 한다. 코미디도 하나의 예술작품이고 모든 예술작품은 시대를 반영하고 당대 사람들의 공감대를 담을 수밖에 없다. 젊은 사람들은 나를 모르지만 50대를 넘어간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는데 그 알아보는 것에 공감이 있는 것이다. 젊었을 때의 박수는 코미디 아이디어와 수준에 따라오는 박수라면 지금의 박수는 인생의 뜨거운 공감의 박수다. 한 시대를 공감하고 살았던 관객들은 오늘 이 자리가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내준다. (이 말을 하며 정귀영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MBC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의 사회는 어떻게 보게 되었나?

90년대 중반부터 7년 동안 어린이 교육프로그램 ‘뽀뽀뽀’에서 ‘달봉이’로 사회를 보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사회를 보게 되었는데 돌아보면 그 우연이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뽀식이’ 이용식 선배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캐스팅 되었는데 그 잠깐이 7년이 되었다. ‘뽀뽀뽀’ 담당PD가 국장과 이사의 사인을 받으러 가니까 국장은 고향선배이고 이사는 ‘아! 이 친구! 우리 아들 결혼식 때 주차 관리를 하던 친군데 아주 성실하게 잘하더구먼’하고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일상의 나의 모습과 태도가 나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사람들을 대할 때 단 한사람도 허투루 대하는 경우가 없이 진심과 성의로 대한다. 


▲ MBC 뽀뽀뽀 달봉이 시절의 정귀영 씨     © 정귀영 제공


지금은 어떻게 지내나?

지금이야 뭐 나이가 들어 선조들의 땅 여주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다. 여주는 참 살기가 좋은 곳이다. 여주의 강과 들, 산은 그 자체가 수천억을 주고도 꾸밀 수 없는 훌륭한 무대이다. 마을 행사에서 사회도 보고 동네 노래자랑도 진행한다. 가끔 ‘실버TV’나 ‘복지방송’의 진행과 리포터를 맡아볼 때도 있다. 내가 하는 일은 내가 건강하기만 하면 죽을 때 까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송해 선생님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스스로 보람을 느끼고 천직으로 생각하면 100살까지 할 수 있는 일이 우리 일이다. 


지금도 코미디언으로 먹고 살만 한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먹고 살만 한가?’라고 물으니 ‘먹고 살고 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일은 돈만 보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젊었을 때는 청춘과 열정을 다 쏟아 부어 뛰어 보았고 지금은 소리 소문도 없이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우리 직업이다. 평생을 코미디언으로 살아온 우리 같은 사람은 이 직업을 천직으로 간직하지 못하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우리 같은 연예인들은 군중으로부터 잊히는 것이 제일 두렵다. 그런데 관객은 한명도 관객이고 만 명도 관객이다. 그 관객을 위해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코미디언은 사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직업이다. 어쩌면 코미디언은 무당과 같은 직업일 수 있다. 관객이 한 명이든 만 명이든 그 사람들의 모습을 내안에 받아들여야 한다. 샤머니즘과 같이 그들의 모습이 내안에 자리를 잡아야 관객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다. 


여주의 문화예술 수준은 어떻다고 생각하나?

여주의 문화수준은 최고다. 여주는 600년의 본보기가 되어왔다. 세종대왕이 여주에 계시다는 것이 여주사람들과 여주문화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주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이 강하다. 언젠가 내가 마을잔치에서 사회를 보며 ‘어느 마을에 사는 심 씨를 소개합니다’라고 해더니 그 분이 ‘그냥 심 씨라고 하지 말고 세종대왕의 장인인 심온의 17대 손이라고 소개해 달라’고 하였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여주사람들은 자기 뿌리와 정통성을 굉장히 강조한다. 그리고 여주문화원에 계신 분들은 세종대왕에 대해서만큼은 전국의 그 어느 학자들보다 많이 알고 계신다. 세종을 축으로 여주의 남한강과 역사문화유적이 여주사람들에게 녹아들어 여주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주의 문화예술을 발전시키는 방도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거침없이) 퓨전으로 가야 한다. 여주의 오랜 전통과 문화유적이 현대의 젊은이들과 어우러지게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신륵사 남한강변에서 방탄소년단의 콘서트를 열어야 한다. 세종대왕릉과 명성황후 생가에서 K팝 콘서트를 진행해야 한다. 숭모제와 같은 제례도 반드시 진행해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미래 세대에게 문화유산을 알리고 전할 수 없다.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라도 K팝과 같은 신문화를 섞어야 한다. 글쓰기나 제례는 중국이 더 잘하는데 중국 관광객이 좋아하는 것을 여주의 문화 속에 녹여내야 한다.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자동차 100만대를 판 것보다 더 큰 값어치가 있다고 한다. 이제는 문화유산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다. 세종대왕을 중심으로 한 여주의 이 훌륭한 문화유산은 여주의 보물이고 천년만년 먹고 살 여주사람들의 재산이다. 


평소에 세종대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그 분도 따지고 보면 예술가이다. 한글을 창작하고 측우기를 발명하셨다. 권력을 쥔 보수의 꼭대기에 계시면서도 사회진보를 추구하셨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들도 보수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보적인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사회를 비판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생각하여 많은 것을 창조하고 발명했는데 우리도 사람들을 위해 연기를 하다보면 어디에선가 같은 지점에 닿게 되는 것 같다. 백성을 생각하고 사람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일을 하다보면 보수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 진보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뭐 순전히 내 생각이긴 하지만 우리 코미디언의 코드 안에도 세종의 애민정신이 담겨있다고 본다. 허허허!


여주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

코미디언은 죽을 때 까지 관객들과 더불어 공유하는 삶이다. 이 나이에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재현해 보겠다는 꿈을 꾸는 것은 겨울 땅에 봄이라고 착각하고 새싹을 틔우려는 것과 같이 무모하고 위험한 것이다. 코미디언 40년의 길을 걸어왔고 또 그 길을 계속 걷고 있는데 지금은 연기를 하는 나도, 나의 연기를 보는 관객도 모두가 애환으로 서로를 어루만져 주게 된다. 내 또래의 관객이 나의 연기를 보면서 웃고 울고 하며 희로애락을 느낀다면 우리는 관객의 모습과 반응으로 또 다른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희로애락을 느낀다. 
여주에서 여주의 풍부한 문화와 자연환경에 의지하며 여주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울고 하며 오래도록 애환을 서로 나누고 싶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라고 그 사람들이 누구라도 나는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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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3/08 [15:55]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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