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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29-‘5백년 선비의 기풍을 격려한 효과가 선생의 한 몸에서 수확되었다’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02/25 [11:15]
▲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실록에는 종종 졸기(卒記)가 나온다. 당시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죽음을 맞게 되면 그의 삶에 대해 간략하지만 핵심만 간추린 인생평인 셈이다. 졸기를 보면 기록한 사관의 엄혹함이 보이기도 하고 돌아간 인물에 대한 선의의 덕담도 있다.

세종1년 4월 고려문하주서 야은 길재(吉再)의 졸기가 실려 있다. 고려말 대표적인 충신이자 선비인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더불어 삼은(隱)으로 불린다. 가장 유명한 시가 망국의 한을 노래한 회고시조다. 조선왕조가 개국한 이후 송도(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황량한 옛 도읍을 둘러보며 지은 시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실록에 기록된 졸기를 인용해 본다. 세종1년 4월 12일의 기록이다.
 
고려 문하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부의로 백미·콩 15석과 종이 1백 권을 보내고, 따라서 매장할 인부를 마련해 주게 하였다. 길재의 자는 재부(再夫)요, 호는 야은(冶隱)인데, 혹은 금오산인(金鰲山人)이라고도 하였다. 선산부(善山府)에 소속된 해평현(海平縣) 사람이다. 

길재는 어릴 적부터 청수하고 영리하였다. 아버지 길원진(吉元進)은 서울에서 벼슬하고, 길재는 어머니 김씨를 따라서 시골에 있었다. 원진이 보성(寶城) 고을 원이 되자, 어머니도 같이 가는데, 봉급이 워낙 박하여, 길재를 외가에 남겨 두니, 그 때 나이 8세였다. 

하루는 혼자서 남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가재 한 마리를 잡아 들고 노래 부르기를,
 
가재야 가재야, 
너도 어미를 잃었느냐. 
나는 너를 삶아 먹고 싶지만, 
네가 어미를 잃은 것이 
나와 같기로 너를 놓아준다.
 
하고 물에 던지며, 너무도 슬피 부르짖으니, 이웃집 할멈이 보고 흐느껴 울었고, 온 고을 사람이 듣고 눈물을 아니 흘리는 자 없었다.
 
8살 꼬마의 영민함뿐만 아니라 그 마음의 애절함이 함께 묻어난다. 
 
뒤에 (아버지) 원진은 서울로 가고,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진이 또 노(盧)씨에게 장가들고 어머니를 박대하여, 어머니가 원망하니, 길재는 어머니께 말하기를,
"아내가 남편에게나, 자식이 어버이에게는 비록 불의(不義)의 일이 있을지라도,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조금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인륜에 괴변은 옛날 성인도 면하지 못했으니, 다만 바르게 처사하여 정상으로 돌아올 때를 기다릴 따름입니다."
하니, 어머니는 감동하여, 마침내 원망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아니하였다.
 
당시의 윤리의식으로는 부인이 남편을 원망하는 일을 사대부의 집안에서는 금기시하였던 모양이다. 이제 막 학문을 하는 자식이 어머니에게 타이르는 바가 이채롭다. ‘바르게 처신하여 정상으로 돌아올 때를 기다립시다’란 권유를 한다. 
 
길재는 나이 18세에 상주사록(尙州司錄) 박비(朴賁)를 찾아가서 공부하였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말도 종도 없는데, 하루는 어머니에게 하직하며 하는 말이,
"아버지를 두고 뵙지 못하니,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
하고, 곧 박비를 따라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섬기어 효성이 지극하였다. 
(새어머니) 노씨가 사랑하지 아니하나, 길재는 공경과 효도를 다하니, 노씨는 감화되어, 자기가 난 자식과 같이 대접하여, 이웃 마을에서도 칭찬하였다. 드디어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국학에 입학하여 생원·진사에 합격하였다. 
상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입학하여 글을 읽으니, 길재는 한 마을에 사는 관계로 상종하여 학을 연구하며, 정의가 매우 단란하였다. 신우(辛禑)의 병인년에 과거에 올랐다. 신우(우왕)가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되자, 길재는 시를 짓되,
 
몸은 비록 특별난 것 없지마는, 
백이·숙제 수양산에 굶어 죽는 뜻을 가졌다.
 
라고 하였다. 기사년에 문하 주서(門下注書)가 되었다. 경오년 봄에 나라가 장차 위태함을 알고서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는 길에 이색에게 들러 하직을 고하니, 이색은 시를 지어 주되,
구름같은 벼슬 따윈 급급할 바 아니라서, 
기러기 아득아득 공중으로 날아가네.
 
하였다. 길재는 드디어 선산(善山)의 옛집에 돌아와 여러 차례 불러도 나가지 아니하였다. 신우(우왕)의 흉보를 듣게 되자, 3년 복을 입고 채과해장(菜果醢漿)을 먹지 아니하였으며,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여 혼정 신성(昏定晨省)을 폐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올렸다. 집안에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늘 흔연하여 조금도 염려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학도(學徒)를 가르치되 효제충신(孝悌忠信)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먼저 하였다.
 
서울의 국학, 그러니까 가장 공부 잘하는 청년들이 모이는 곳에 들어가서 당대의 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색과 정몽주, 권근등과 교류하였으며 이때 태종 이방원과도 교분을 쌓았다. 그런데 당시 신우(신돈의 아들이란 의미)로 불린 우왕이 요동정벌을 명하여 이성계가 명을 받고 떠나자 길재는 장차 나라의 위태함을 걱정했다고 한다. 
 
상왕이 세자가 되자 불러들여 봉상 박사(奉常博士)의 직을 제수하니, 길재는 전문(箋文)을 올려 진정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였는데, 신은 초래(草萊)의 태생으로 위조(僞朝)에 신하되어 벼슬까지 받았으니, 다시 또 거룩한 조정에 출사하여, 풍교에 누(累)를 끼칠 수 없습니다."
하므로, 상왕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후한 예로 대접해 보내고 그 집안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상왕 태종도 벼슬을 사양하는 길재를 후대하며 결코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이후 아들 사순이 임금의 부름을 받자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사순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가게 되어, 길재는 훈계하기를,
"임금이 먼저 신하를 불러 보는 것은 3대 이후의 드문 일이니, 너는 마땅히 내가 고려에 쏠리는 그 마음을 본받아 네 조선의 임금을 섬기도록 하라.” 고 하였다.
 
졸기의 마지막에는 다름과 같은 평이 달려있다.
 
밤이면 반드시 고요히 앉았다가 밤 중에야 잠들며, 혹은 옷깃을 여미고 날을 새기도 하며, 닭이 처음 울면 의관을 갖추고 사당 및 선성(先聖)께 절하고, 자제와 더불어 경서를 강론하며, 비록 병이 들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고려 5백 년에 교화를 배양하여 선비의 기풍을 격려한 효과가 선생의 한 몸에서 수확되었고, 조선 억만년에 강상(綱常)을 부식하여 신하 된 절개를 밝히는 근본이 선생의 한 몸에서 터를 닦았으니, 명교(名敎;유교)에 유공(有功;특별한 공로가 있음)함이 이보다 클 수 없다.”
 
우리 시대의 졸기에 이러한 글을 남길 이가 어디 있을까.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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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25 [11:15]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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