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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여행28-‘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백성의 수고를 더 해서는 안 된다’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02/13 [15:58]
▲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세종이 임금에 즉위한 이후 어느 정도 정국이 안정되는 시점이다. 초보정치의 딱지를 떼고, 장인이 죽고 처갓집이 몰락하는 정치적 격변을 지나면서 이제 정치적 임무에 집중하는 과정인데 참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큰 사건들은 아니지만 자질구레한 일들이 계속 이어지는 부분들을 한번 살펴보면 세종의 나랏일을 보는 방식과 백성에 대한 입장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공부하기를 좋아하며 학자들과의 토론장인 경연을 즐겨 했다. 때는 봄날이다.
 
경연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읽기는 다 읽었으나, 또 읽고 싶다.”
고 하니, 동지경연(同知經筵) 이지강(李之剛)이 아뢰기를,
“읽고 또 읽는 것이 성의(誠意)의 공부를 다하는 것이옵니다.” 하였다. (세종원년 3월 6일)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종강(終講)하였다. 임금은 정사에 부지런하고 천성이 글 읽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편전에서 정사를 보고 나면 경연을 열되, 상왕의 외유나 연회를 받드는 이외에는 잠깐도 폐한 일이 없었다. (세종원년 3월 27일)

정사를 보고 경연에 나아갔다. 다시 《대학연의》를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원년 3월30일)
 
채 한 달이 되지 않는 시점에 세종의 정치교과서라고 할 대학연의를 다 읽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두 번째 읽은 것이다. 그리고 한달 내에 한 번을 더 보고 다시 보기 시작했다. 

대학연의가 세종정치에 끼친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 세종의 정치맥락에는 민주주의의 합의제와 백성이 주인이라는 사상이 많이 보인다. 아마 이런 정치적 실천과 정책의 집행에는 맹자의 왕도정치와 현대의 민주주의가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백성을 위한 제왕의 고뇌와 결단은 결국 백성의 소리를 잘 듣고 미리 헤아리는 바가 클 것이다. 요즘 정치가 오직 정치적 이해득실에만 매달리고 국민들의 민생에는 무관심하게 보이는듯해 매우 불편하게 느껴지는 시대에 세종의 생각은 이미 백성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어지는 기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평안도 학생 이화농(李華穠)이 성균관에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먼 지방에서 배우러 온 그 뜻이 가상하오니, 입학을 허하여 주시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년 3월7일)
 
뜻이 가상해서 국가 최고 교육기관의 입학을 허락해 준다.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부정입학이 될 수도 있겠으나 당시에는 이런 인간적인 요소들이 작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 보기 좋게 여겨진다. 물론 기록되지 않은 나름의 시험은 거쳤겠지만. 
 
음력 3월을 지나고 있다. 지금 시기는 보리가 익기 전이고 식량이 대부분 떨어질 때다. 일명 보릿고개를 넘어가는 시점이다. 충청도에서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난민구제가 중국의 그것과 좀 다르기에 이를 좀 바로잡고자 함이란 내용이다. 
 
충청도 관찰사 이맹균(李孟畇)이 계하기를,
“지나간 을미년에 호조의 공문으로 된 난민 구제 규정의 내용을 보면, 장년(壯年)의 남녀는 매인당 하루에 쌀 4홉, 콩 3홉, 매주 1홉, 11세에서 15세까지는 매인당 쌀 2홉, 콩 2홉, 비지 반 홉씩이옵니다. 그런데 송(宋)나라 부필(富弼)의 청주(靑州) 난민에 대한 구제 규정 내용은…(중국의 것보다 적으니 조금 더 올려 줍시다)” 하니, 의정부와 6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한 바, 다 말하기를,
“나누어 주는 것은 전례대로 하고, 백성에 종자 곡식을 대출하여 농사를 권장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여, 그대로 따랐다. (세종원년 3월 9일)
 
사소한 일인 듯 보이지만 실은 중요한 타협점이라고 본다. 먹고 사는 부분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농사씨앗은 꼭 필요한 것이니 그것을 추가로 대출해서 농사가 잘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결정이다. 복지를 확대하는 차원과 생업을 이어갈 수 있게 일자리나 자립을 위한 자금지원의 이원적 생각이 이곳에 묻어있다. 무조건적인 복지확대인가 아니면 자립경제를 위한 마중물인가를 저울질하며 최선의 조합을 찾아나가는 지혜가 지금도 절실히 필요하다. 
 
당시 상왕 태종은 임금의 뒤에 있는 실질적인 권력자였고 후견인이었다. 태종은 사냥을 좋아했는데 이때 해청이라는 매를 가지고 사냥하기를 즐겨 했다. 해동청이라고도 불리는 해청은 아주 날렵하고 보기에도 매우 아름다웠던 것 같다. 임금과 함께 매사냥을 나가고 싶은 마음을 내비치는 대목이다.
 
상왕이 조말생에게 말하기를,
“해청(海靑)이란 물건이 부리나 발톱이 다 하얗고 보통 매와 사뭇 다르므로, 주상과 함께 동녘 들에 가서 시험해 보고 싶은데, 다만 주상의 외출에 대하여 물의가 있을까 염려된다.”
하니, 조말생들은 아뢰기를,
“하룻동안 나가시는 것이야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세종원년 3월 23일)
 
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동교(東郊)에 나아가서 해청(海靑)을 날리는 것을 구경하는데, 하도 날래어 놓아 주면 바로 곧 새들을 잡아 오니, 상왕이 무척 진귀하게 여겼다. (세종원년 3월 25일)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세종의 이름이 이도(李祹)인데 역마를 머물게 하는 곳인 요즘의 정거장 같은 곳의 이름이 임금의 이름 발음과 같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바꾸자는 제안까지 논의되기도 했다.
 
충청도 감사가 이도역(利道驛)을 이인역(利仁驛)으로 고치자고 주청하였다. 임금의 이름과 음이 서로 같음을 피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원년 4월4일)

추수한 곡식을 길가에 쌓아두어 썩거나 손실을 입을 수 있으니 곡식저장창고를 짓자는 제안인데 세종의 반응이 신하와 다르다. 공무원인 신하는 필요에 따라 채우려는 바이다. 마땅히 할 일이다. 하지만 임금은 백성의 수고로움을 생각하여 창고건설의 필요를 미루거나 다른 대안으로 대체하기를 원했다. 
 
호조 참판 이지강(李之剛)이 계하기를,
“풍저창(豊儲倉) 백미를 행랑의 비습(卑濕)한 땅에 쌓아 놓으니, 부패하기 쉽고, 또 노적(露積)은 비바람을 가릴 수 없으니, 창고 수십 간을 지어서 금년 추수를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토목 역사(土木役事)를 하고 싶지 않다. 대산(臺山)의 궁전과 남랑(南廊)의 역사가 끝나면, 다시 인력을 수고롭게 아니할 생각이다. 창고는 짓지 않을 수 없지만, 지금 흉년을 만나고 또 농사 때를 당했는데, 공사를 시작한다는 것은 마땅치 않다.” 고 하였다. (원년 4월 9일)
 
‘짓지 않을 수 없지만…’이란 이 말에는 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 백성을 수고롭게 할 수는 없는 때임을 밝힌다. 공사에 동원되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수고를 다하면서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힘든 상황에 내몰리는 많은 사람들을 염려한다는 것은 직접 겪지 않은 일에도 깊은 공감을 할 줄 아는 지도자의 품성이 묻어난다. 세종정치의 바탕에는 바로 이 측은지심과 공감능력이 있었다.     

세종신문 대표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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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13 [15:58]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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