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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陵)의 천장설화
잘 알려지지 않은 세종대왕 이야기 ①
 
세종신문   기사입력  2019/01/07 [10:54]
▲ 세종대왕릉(영릉)     ©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여주시 능서면에 위치한 영릉(英陵, 사적 제195호)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영면해 계시는 왕릉이다. 원래 세종대왕릉은 태종 헌릉 서쪽 언덕에 있었다. 

그러나 능의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1469년(예종1)에 결국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여주 서쪽의 북성산으로 천장(遷葬)하였다. 

당시 왕릉자리는 한양에서 왕이 하루 만에 닿을 수 있는 거리인 100리(약 40㎞) 이내로 정했는데, 영릉은 물길로 100리라는 기준을 내세워 정했을 만큼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다.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세종대왕릉을 ‘왕릉 중에 제일’이라 칭송했고, 풍수가들도 ‘영릉의 덕으로 조선왕조의 국운이 백년이 더 연장되었다’고 말하는 이곳에 성군 세종대왕이 잠들어 계신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세종대왕릉이 여주로 천장되기 전 이 터에는 광주 이씨 이인손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인손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지관은 자신이 일러주는 내용을 유언으로 쓰는 조건으로 묘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첫째는 묘택 앞을 흐르는 개울에 절대로 다리를 놓지 말 것이며, 둘째는 재실이나 사당 등의 건물은 일체 짓지 말라는 것이었다. 

후손들은 처음에는 그의 유언을 지켰으나 이어서 정승, 판서가 쏟아져 나오니 가문의 격에 맞게 재실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예종의 명으로 세종대왕의 능 자리를 보러온 지관은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이 주위를 돌아다니다 소나기를 만났다. 주위에 인가가 없어 쏟아지는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산자락아래 조그만 건물을 발견했다. 바로 광주 이씨 문중에서 지은 재실이었다. 소나기가 그치고 주위를 둘러본 지관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보아도 틀림없는 명당자리였던 것이다. 이인손의 묘택임을 확인한 지관은 고심하다 이 자리에 이미 묘택이 있음을 고하면서 세종대왕의 능 자리로 추천한다. 그리고 그 자리는 군왕의 능으로는 적합하지만 정승의 묘로는 과분하다는 뜻을 전했다. 

예종은 광주 이씨 가문에 많은 재물을 하사하고 조선의 어느 곳이라도 묘를 쓰라고 하였다. 이인손의 묘를 파서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 ‘이 자리의 주인이 나타나면 이곳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 연이 떨어지는 곳에 묘를 옮기라’고 적힌 편지가 놓여 있었다. 

후손들이 이곳에서 연을 날리자 서쪽으로 약 10리 밖에 떨어졌고, 이곳에 이인손의 묘택을 삼았는데, 현재도 이곳을 연이 떨어졌다하여 연당이라고 부르며, 연이 떨어진 장소는 바로 연주리, 지금의 능서면 신지리라고 전해 온다.

세종신문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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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07 [10:54]  최종편집: ⓒ 세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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